하얀 침묵 속에 피어난 애정의 한 조각
조 병 진
서른 한 살로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세는 달빛을 서창가에 보내며 외로운 슈베르트의 영혼을 부드럽게 만져준 여인의 손길이 왜 없기야 했겠느냐 마는, 슈베르트가 사랑을 목마르게 외쳐보기에는 그가 너무도 수줍은 탓이었고 가난에 쪼들린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거처할 수 있는 방 한 칸을 가져보지 못한 채 생애를 마친 젊은 슈베르트는 피아노 조차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그렇다고 친구마저 없는 게 아니었다. 시인, 화가, 가수. 가난했던 슈베르트에게는 이런 계층의 친구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기에 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친구의 집에서 피곤한 몸을 눕혔고, 친구의 피아노를 치며 천부(天賦)적인 재질을 키워갔던 것이다. 뷔엔나 짙은 숲 그늘을 거닐면서 작곡에 몰두했고, 소란스런 카페에서 친구들과 떠들석하게 지껄이며, 싸구려 레스토랑 구석에서 “들어라들어라 종달새”의 유명한 노래를 작곡했던 것이다.
“아 오선지! 오선지가 없구나!” 테이블을 치며 외치는 슈베르트에게 친구는 레스토랑 메뉴 카드 뒤에다 오선을 그려주었다. 이 초라한 오선 위에 주옥같은 ‘아베마리아, 세레나데’ 같은 가슴을 파고드는 주옥같은 멜로디가 탄생한 것이다.
가난했고 고독했던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정을 통할 수 있는 친구들뿐이었다. 모리스 슈뷘트란 화가 역시 그의 가까운 친구였고, 누구보다도 많이 슈베르트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의 그림은 지금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여러 박물관에서 진귀한 광채를 뿜고 있지만, 대화가로서 만년의 그가 가장 행복스러웠던 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슈베르트의 많은 초상화가 오늘날 얼마나 진귀한 보물들로 되어 있는가. 나는 행복한 화가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싸구려 레스토랑에서 오선지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젊은 슈베르트에게 메뉴 카드 뒤에다 오선지를 그려줬을 때였다”고 말했다.
음악가는 오선지가 필요하듯, 글을 쓰는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만치 백지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다. 하얀 종만 보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모아둔다. 그리고는 언제 어느 때고 꺼내어 무엇을 써보기도 한다. 그것이 한 편의 수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내가 어릴 때 지금처럼 종이가 흔하지 않았기에 벽장 안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짝깔로 마름질하여 썼다. 마름질한 종이는 아버지 전용 책반닫이에 넣어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그 크고 깨끗한 종이 한 장을 얻고 싶어도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 종이를 마름질을 할 때면 으례 나는 그 잔 심부름을 하면서 토막난 종이를 얻을 수 있었다. 어릴 적의 이런 경험 탓인지 아직도 나는 백지를 아끼고 무조건 좋아한다. 이따금 가슴속에 부딪쳐 오는 어떤 상념 혹은 감정에 포착되는 이미지를 나는 소중히 간직한다. 일상인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 설사 느낀다 해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것을 글로서 현형 시키고 구체화 하다보면 무한정의 사연도 백지에서 읽게된다. 하얀 침묵의 언어는 기다림 끝에 피어난 내 애정의 한 조각이다.
문학이라는 창작 분야에 투신한 문인끼리 모여 앉으면 이따금 글쓰기가 끔찍하다고 고심(苦心)을 털어놓는다.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작업이 부담스러워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을 때도 없지 않다. 이러한 문학인 공통의 괴로움은 좀 더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남모를 몸부림이 아닐까. 문학이라는 창작예술, 다분히 영감(靈感)에 의지해서 고독하게 백지 위에 삶을 구축해 가는 이 작업에는 한층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정신적 고투(苦鬪)가 따르지만, 구도(求道)하듯 백지를 보면 나는 고요 속에 침묵이 흐르고 헝클어진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펜을 들어 한두 자를 쓰다보면 나도 모를 내적인 충동에 의해 내 머리 속에서 누에가 실은 뽑아내듯 한 구절 한 구절 풀어져 나오는 일이야말로 영감의 산물이라 할 밖에 없다. 함께 느끼고 생각하며 공감하는 그 한편의 수필을 낳기 위하여 잠을 버리고 감정의 순화 지대인 백지 앞에 무릎을 꿇고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삶의 보람이요, 희열이다.
작곡자나 화가에게도 백지공포라는 게 있다고 한다. 글을 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표현 방법이 여하튼간에 자신이 사고하고 의도하는 바를 형태화하기 위해 백지와 마주하게 될 때 만나게 되는 하염없는 막연함. 그것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끔찍한 백지의 공포에서 시달리게 마련이다. 정리된 원고를 여하히 배열하고 어떻게 오류를 방지하며 보다 아름답게, 그리고 깔끔하게 퇴고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숙제이다. 백지가 나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은 그 여백을 온전하게 채워 달라는 것이다. 그 채움은 아주 주관적 작업이기도 하지만 객관적 현실을 바탕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창작의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피를 말리는 고통이 끝난 후, 그 속에 담긴 나만의 고민과 한숨, 수없이 반복되는 퇴고의 과정을 거친 고뇌의 산물로 단순히 물리적 크기와 무게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스스로 창작할 수 있는 이들만이 소유하는 행복함과 만족감. 그리고 그것을 백지 위에 내 애정의 한 조각을 곱게 수놓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쟁이만의 즐거움, 그것은 백지가 나에게 선사하는 미학의 선물이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는 나로서는 제일 흐뭇한 때가 자신이 발표한 글이 독자의 관심을 끌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저물어 간다. 매번 거듭된 일이지만 또 다시 시작하는 한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펜을 든다. 슈베르트에게 오선지를 그려준 모리스 슈뷘트가 있었듯, 나에게도 삶의 백지 위에 오선지를 그려준 아내와 아들이 있기에 희노애락의 주옥같은 나만의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하얀 침묵 속에 내 애정의 한 조각 수를 놓기 위해 고민을 거듭할 것이 분명하지만, 백지가 주는 고통은 바로 백지의 미학이다.
출처 : 수필사랑
글쓴이 : 홍억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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