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탕 / 안시아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추억의 수위는 수평선을 넘나들고 앗, 끓는 바다를 맨 입술로 그 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그 날도 노을빛이 퍼졌다 그 흔적, 바다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바다에 추억을 데이고, 입안이 까실하다 텅 빈 용기 안, 수평선이 그을려 있다
파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뽑아놓은 대파,
파는 벗겨저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같은 인생이 꽉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커먼 방한복에다 똘똘 뭉쳐 눌러 앉혀놓았으니,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라면은 나쁘다 / 김륭
사람을 열불 나게 한다.
라면은 글쎄, 촌놈들 형편을 몰라도 너무 몰라.
올해도 「金치」라며?
히죽히죽 웃음 이파리 흔드는 현대아파트 A동 1029호 金봉섭씨는
손바닥만한 시골밭뙈기에 앉아 시퍼렇게 눈에 불을 켠
배추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서울 놈이다.
배추파동이니 무파동이니……,
한해 걸러 밭떼기를 갈아엎는 아버지에게 라면은
음식이 아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람이다.
일곱 남매도 모자라 바득바득 개돼지까지 먹여 살린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찌든 가난도 오동통하게 삶아내셨지만
퍼질수록 양이 많아진다는 게 문제다.
집안을 말아먹고 나라마저 팔아먹을 놈이 틀림없다고
핏대 올리시는 아버지, 그러다가도 밥은 묵었나 하시는 당신
빚더미로 쌓아올린 우리 집 현대사를
부글부글 끓게 한다.
장독을 버린 김치가 냉장고 품에 안기자 할머니 돌아가셨고
일회용종이컵과 눈 맞은 라면이 뻥, 양은냄비 찌그러진 엉덩이 걷어차자
냉큼 날 버렸다. 아내는,
참 나쁘다. 장독을 버린 김치도 나쁘지만
김치냉장고에 안겨 껑충, 몸값을 올린 「金치」를 찾아
필시 짝짓기를 하는 라면은
정말 나쁘다.
-'2007 젊은 시' 에서
파리 / 김륭
책상 한쪽 모서리 먼지 둘러쓴 시집에 느긋이 앉아 똥싸는 파리가 있는가하면
늦은 밥상머리에 앉아 싹싹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파리도 있다
제대로 목숨 걸만한 사랑을 발견해내는 파리가 있는가하면
스스로 목숨 구걸하러 다니는 파리도 있다
파리도 지옥은 안다
다족류 이야기 / 유홍준
너는 아예
신발이 없다
발이 많으면 어느 신발에 신을 신어야할지 헷갈리기 때문
신발이란
고작
두발 짐승이나 신는 것이기 때문
거추장스럽다고
사는 것도
신발도 모두 다 거추장스럽다고
지네야 그리마야 다족류들아 이렇게 발 많은 네기
지옥이든 천당이든 어기여차 어기여차 …… 가지 못할 곳이 없다고
-<서시> 2007년 여름호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강연호
지리산 산동 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은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국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면은 이명이고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 안에서 가만가만 굴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 전 미쳐 못 다란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혀와 잇몸 같은 열매가 간절했답니다
어쩌면 이명이 낫는 대신, 지난 봄의 노란 꽃잎마냥 눈이 환해지거나
열매처럼 붉은 목젖이 자랄 수도 있었겠지요
마을은 한참 산수유 열매를 따서 널어 날리는 중이었습니다
씨앗을 들어낸 뒤 마당이나 길바닥에 펼쳐진 열매들은
넌출거리는 가을 빛에 쪼글쪼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득,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처럼 서글펐답니다
이제 돌아가면 오래 전의 쑥뜸 자국 같은 한숨 한 번 몰아쉰 뒤
이명보다 깊은 잠들 수 있을는지요
산수유 사러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흘러 다니는 그림자들 / 신지혜
사람은 없고 사람 그림자만 돌아다닌다
그림자들이 검은 자루처럼 밑으로 쳐진다 혹은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나기도 하고 형체를
바꾸기도 한다 벽이나 문지방에 붙어있기도 한다
가만히 보라
이슥한 저녁, 주체할 수 없어 쓰러지는
벽들을 떠받치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들뿐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들 몰래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른다
혹은 주인이 잠자리 들 때 몰래 탈출하기도 한다
그림자가 출몰하는 곳에선
늘상 그림자들끼리 주인을 팔아치우기 위해
암거래가 이루어진다 보았는가 거리를 떠도는
그림자들은 동작이 민첩하다
그림자들은 모의하여, 자신의 주인을 멀리
추방시키기도 한다 한때의 권력이 되었던 주인은
위기의 벼랑 앞에서 최후의 목격자인 자기 그림자 앞에
두 무릎을 꿇을 때 있다
지금 네 옆을 돌아보라 그림자들이
침묵으로 네게 반란한다
시집 <밑줄> 2007년 천년의시작
여름 숲에 들다 / 주로진
숲속에 드니 파랗게 물이 든다
장마는 그쳤다
긴 장마 끝 햇살 눈부신 날
골짜기 그늘 이끼 푸르고
개울은 철철 몸이 불었다
울창한 계곡 나뭇가지끝
날개옷 한 벌 대롱대롱 걸려있다
비 그친 숲 요란한 매미 울음
어디선가 씨 여무는 소리
귓불을 간질이던 바람
출렁출렁 다래넝쿨 타고 있다
왁자한 개울에 매미 울음 떠내려간다
시집 <빨간우체통> 문학의전당. 마음의 시 15
흑백사진 / 조연호
구멍 좁은 단추의 안쪽이 너에게 마음을 달아준다 그해 국광의 붉은 빛깔, 자기 무릎에 머리를 대던 어미소의 평화로운 열병, 물옥잠의 구멍난 부레가 모두 바둑돌의 黑과 白이었다. 지천의 꽃들이 허공을 향해 시작되던 하혈도, 네가 빨아들던 담배 끝 새빨간 불꽃도 다만 개의 눈이 바라보던 흑빛 세상.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오빠, 몇 해 동안 분갈이 해보지 못한 오빠, 이삿짐 속 허름한 이삿짐이던 오빠,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면 네가 흘린 얼룩들이 고분고분 닦여나왔다. 대야에 담긴 빨래처럼 누군가 헹궈주기를 바라며 마음이 세제거품 몇 알갱이에 의지해 둥실 떠있다. 골목마다 칸칸이 놓여있던 쓰레기통들이 모두 네 고향이던 때, 남루한 밤이 네게 마음을 매달아 준다. 한밤 뒷간에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 훗날 애인 얼굴이 나타난대, 기억이 포도알처럼 자주색 피를 쏟으며 달게 터졌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운명인가 봐, 수은칠이 반쯤 벗겨진 거울 안에서 나는 너를 흉내내며 비스듬히 잘린 채 반쯤 웃었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2004년 천년의시작
물밑의 피아노 / 조연호
누나가 바늘에 꿴 실로 글자를 쓴다, 작은 집들이 산턱에서 사라진 후 케이블카가 그 위를 종일 왕복하고 있었다. 누나, 피아노들이 떠오르고 있어. 앞코가 찢어진 신발 속으로 물이 드나들고, 누나의 글씨쓰기는 앞과 뒤가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누나가 쓴 글자는 한없이 느려져 겨울이 되어서야 한 장의 편지가 될 것이다. 억울해 억울해 지덕노체 4H구락부 마크가 찍힌 무너진 집 벽을 끌어안고 청년이 울 때 그의 나이 많은 두 형제는 발톱을 깎고 있었다. 생애 이렇게 눈부신 날, 누구나 자기 눈을 찌른 첫 번째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누른 검은 건반을 누나의 흰 건반이 감쌀 때, 피아노의 다리들은 물 밖을 나오지 않는 것으로 여름과의 약속을 지켰다.
밑줄 / 신지혜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여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시집 <밑줄> 2007년 천년의시작
안개타운 / 신지혜
내 팔을 만져보아라 내 몸은 안개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물론 내 뼈와 피의 원료 역시 차가운 안개,
내 숨소리 귀울여보면 안개들이 바스락거리며
깨어나는 소리, 말소리, 흐느끼는 소리,
내 딱딱한 입술은 안개 콜크로 밀봉되었다 어쩌다
힘겹게 내 입술을 딸 때마다 스스스 흩어져버리는
희고 미끄러운 말들,
내 폐부 깊숙이 혹은 뇌속에도 안개를 쏟아 붓는다
이제 안개에 흠뻑 중독 되버린 사람들이
안개 목책에 기댄 채 차륵, 차르륵 서로의 뼈
뭉개지는 소리 듣는다
나를 낳은 무수한 안개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들 중, 어느 누구는 혹여 내 몸에서 태어나기도
하였으리 혹은, 한때 내가 낳은 아이는
내 전생의 오래된 안개 조상이기도 했을 것이리
나는 지금, 곧 사라져버릴 안개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안개 한잔 주문한다 안개는 방부제없이도 결코
상하지 않는다 천 오백년 전 안개젖소의 온기가 아직 스며있다
벌써 창밖엔, 머리칼 치렁하게 나부끼던 위핑 윌로우 칩 나무들
무릎아래가 반쯤 잘려져 나갔다
안개집으로 속속 귀가할 우리들 서로 다정하게
안개웃음 한 컵씩 나누고 등을 돌린다 고대에도 먼 미래에도
다시 잠깐씩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는 바로 그 황홀한,
안개 타운인 것이다
시집 <밑줄> 2007년 천년의시작
짐 / 신광철
인생이란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것이다
바람속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도 어쩌면 꽃이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몇 날은 행복했다
흔들리면서 일어선 건 다 꽃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겐 향기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너의 짐을 덜어
내가 지고 싶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짐을 지니 그만큼의 하늘이 열리더니
삶의 지평이 휘청,
너에게로 빠졌다
오동나무 / 송찬호
나는 아직도 오동나무를 찾아갔던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그때 나는 너무도 시를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동나무와의 인사는 아름드리 그 허리를 한 번 안아보는 것
근처에서는 딸기나무 관리인인 검은 염소가
청동의 고삐를 잃어버린 것일까,
온통 딸기나무밭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오동나무는 말했다 나무 위쪽으론 빠끔한 하늘을
그냥 흑판으로 쓰는 작은 산비둘기 학교가 있고 발 아래
뿌리가 뻗어나간 곳까지 일궈놓은 십여평의 그늘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그 말을 들어서일까 나무 아래 앉아 먹는
청태의 그늘을 뜯어 누른 오동나무 막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그리고 오동나무 따님이 내온 냉차는 얼마나 시원하던가
그때 계절은 참으로 치열했었다
염소의 두 뿔과 붉은 딸기가 얼마나 범벅이었는지
냇가에서는 돌과 잉어의 배가 얼마나 딴딴해 졌는지
지금도 나는 언덕 위 그 오동나무를 기억하고 있다
다리 건너 입구의 오동나무 우체통, 현관 앞 오분씩 늦게 가는 오래된 오동나무 괘종시계
진흙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던 오동나무 구두, 부엌 쪽 오동나무 도마소리……
매혹(魅惑)/나금숙
보라는 등 뒤에 숨는 울먹한 색이다
드러나기를 두려워한다
창고 옆 수국꽃 그늘 아래
묻어 둔 편지처럼 수줍다
흔들리는 등꽃 아래 누워 자던
너의 흰 이마에 드리우던 반그늘
일몰 무렵 긴 열차
차창 너머 산 어스름
한때 이런 처연한 빛을 보면
구름 위를 걷듯 세상이 막연해지곤 했다
사랑도 손에 쥐어져야 느껴지는 이쯤에도
보라는 여전히 매혹이다 언제 보아도
뇌수가 향방 없이 뭉클 쏟아지려 한다
오래 기다린 그대 등을 얼핏 보는 것 같다
더 기다려도 될 것 같다
한번만…조금만…이라고 되뇌다가
언제든 떠나도 될 것 같은,
돌아와도 떠난 흔적이 없는 나라,
보라국(國) 보라 백성들
잘 섞여진 기쁨과 슬픔의 빛
종아리쯤 닿는 맑은 시냇물 속을 걷듯
붙잡지만 또 잘 보내주는 인연들
나는 가끔 장미꽃과 충돌한다 / 김영남
맑은 날 나는 창가의 장미꽃과 충돌했다. 제일 크고 예쁘게 핀 것과 여러 번 충돌했다. 갑자기 부딪히니 아팠다. 눈이 아팠고, 생각이 아팠고, 옛날이 아팠다.
날씨가 너무 맑아 난 장미꽃과 다시 한번 충돌했다. 난 아픈 부위를 문지르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는 내게 멋진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장미꽃이 날 때렸다고 그녀에게 일렀다. 손톱으로 꼬집고 침으로 찔렀다고...... 그랬더니 험하게 할퀴지 않은 것은 장미꽃이 아니라고, 진짜 장미꽃은 따귀를 때려오는 것이라고, 그래서 집에선 기를 수 없는 게 장미꽃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나는 너무나 공허해 가져온 보리차를 엎질러버렸다. 그녀는 날 때린 장미꽃을 탁자 위에 놔두고 찻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장미와, 아니 장미가 아닌 것과 충돌했다. 돌아와 그 꽃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 꽃이 나를 걱정스런 모습으로 쳐다보았다. 걱정 속에서 난 처음으로 향기로운 명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꿈도 오래도록 꾸게 되었다. 날마다 새로운 장미꽃 친구들도 내 창가를 찾아왔고 나는 더 이상 장미꽃과 충돌하지 않았다.
-시와 세계 (2004년 봄호)
구인 / 김성대
내가 잠들면 안경을 벗겨줄 사람
안경을 고이 접어놓고
내 눈동자에 손을 담가 꿈을 정돈해줄 사람
지문이 물결처럼 퍼졌다 돌아오고
눈썹에서 겨울나무가 자랄 때
나의 이륙과 착륙을 수신호해줄 사람
이름을 지우고 중력을 풀고
수레바퀴살을 풀어
나를 무생물로 만들 사람
옷깃에 다시 얼룩이 묻을 때까지
마블링의 호랑이를 만날 때까지
까맣게 나를 놓아줄 사람
주사위놀이를 대신 해줄 사람
그리하여 매번 깨어날 때마다
다른 우주를 낚아줄 사람
온몸을 빛의 점자책으로 만들어
움직이는 벽화를 그리고
꽃 키우는 법을 배우고
종이 접는 법을 배우고
노래의 탯줄을 보관해줄 사람
강을 떠도는 뿌리를 따라
금속과 유릿조각을 모아줄 사람
마블링의 얼굴 기계 속에서
나를 영구히 가공할 사람
그리고
그의 턱을 대신 괴어줄 사람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지금 부재중입니다 / 신단향
먼 곳으로 단숨에 날아온
나는 부재중
이 아름다운 곳에 머물며
낯선 세상과 만나 춤을 추면
싱싱한 물고기가 눈앞을 지나가요 쉬익!
물살을 가로지르는 유연한
내 발에서도 물갈퀴가 돋아요
대서양을,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새도
허공을 가르는 갈퀴가 있을 거예요
그래요, 나는 이제 날개와 물갈퀴가 있어
더는 지루하지 않아요
나는 모니터를 뒤져 재료를 반죽하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들어요
랄랄라 노래 부르며
팔을 달고 심장을 달아줘요
손가락만 하나로 클릭, 클릭
나는 물고기였다가 나무이지요
창밖은 여름이 무성합니다
함께 여행하실 분
신청은 이메일로 받습니다
나는 방문 닫아걸고 부재중,
나는 이 계절에게 삭제되었습니다
이곳은 방콕입니다
오이도에서 / 신단향
오이도 선창가 횟집에서
소주잔에 노을을 담아 마신다
벌거벗은 조개의 마지막 유언이
석쇠 위에 지글거린다
젓가락으로 조개를 집어 올리는 동안
손톱만한 해가 서녘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어느덧 별처럼 네온도 켜지고
쓴 소주 한잔이 가슴을 저민다
너에게 취해 정지된 아득한 사랑을
노을빛으로 달래보지만
너는 왜 멀어져야만 하는지
저 물결인들 말 할 수 있을까
장막처럼 펼쳐진 저녁 하늘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
이렇게, 너는 멀기만한데
오이도 선창가 횟집 통유리창은
노을만 바라보라 한다
얼굴 하나 점점 멀어져가고
나는 취한 두 팔을 펼쳐본다.
조개의 유언이
손등으로 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연꽃잎이 물들지 않듯 / 김지윤
새벽녘 귀를 열고 들어 보면
가장 어여쁜 소리
나무둥치에 깃든 솔바람 소리보다
목마른 잎들을 적시는 새벽 빗소리보다
곱고 청아한 소리
세상 모든 잠든 것들의 숨쉬는 소리
나부끼는 제 어미의 치맛자락 속
다불다불한 머리칼만 바람결에 언뜻 뵈는
저 작은 아이처럼 숨어 잠들어 있는
둥지 속의 아기새들
입술 오므린 작은 꽃들
일상(日常)에 지쳐 잠든 모든 부모들과
철모르는 어린것들의
꿈자리를 어루만지는 새벽빛
더러운 물 속에 피어도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첫 닭울이에 깨어나기 전까지
얼룩 하나 없는 새 종이처럼 깨끗한 것들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 거나
모든 살아있는 것은 다 태평하라, 안락하라
2007 <젊은 시> 문학나무
목련꽃 / 양현주
곳곳에 하얀 전단지 뿌려 놓았네
겨우내 엎드려 쓴 말들이
거리에 날리네
몰아친 황사 바람에
까뭇하게 말라죽은
혈서들
저 빛나는 4월의 주검
군홧발에 밟히네
효자동 거리, 상여꽃 가득하네
그제야
어둠을 깨고 일어난 꽃들이
산하에 깃발을 꽂고
붉은 함성으로 피어나네
몸을 던져
봄의 물꼬를 튼 너를
결코, 잊지 않겠네
이 땅에도 프라하의 봄이 왔네
가습기 / 박수현
내 앞 한 남자가 깊게 잠들어 있다 조금씩 코까지 골며 돌아눕는 그, 목이 마른지 입맛을 다신다 벌린 입에서 껴안을 수 없었던 낮 동안의 일과 권태와 불안이 뒤섞인 쿰쿰한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나는 내 몸을 빙그르 원심분리시켜 잘게 부순 수증기를 그의 위로 뿜어낸다 걸린 옷가지가, 그의 사지가 조금씩 눅눅해진다 쉰내 나는 그의 마음은 여전히 모래가 버석이는지 구름같은 한숨이, 연신 혀를 차는 안개가 뭉글 빠져 나온다 밤새 어지럼증을 견디며 나는 젖은 필터 사이로 몸의 수분을 다 증발시킨다 뻑뻑한 늑골 사이 끄륵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날 때까지,
시향 <2007년 봄호 재수록>
미술시간 / 천외자
너에게로 가는 내 마음의 비좁은 길목에는 폐 염전이 가로놓여 있다
갈대가 무성한 소금밭에 들어갔다가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이 곳에 길을 만들고 길을 따라 사과나무를 심어보려고 도화지에 짙푸른 색을 칠한다
자욱하게 사과 꽃이 피면 네가 더 멀어질까 두렵다
가위를 들고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서 자른다
넓은 개펄이 바닥에 떨어지고 너와 나는 한 발자국이다
푸른 사과나무 잎이 교실 바닥에서 시든다
창 밖으로 염전이 바라보이는 오학년 사반 교실, 미술시간의 언저리에서 길은 짧아지기도 길어지기도 하며 가끔 사과 꽃이 순식간에 피었다가 지기도 한다
넓은 길을 싹둑싹둑 자르는 가위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아이들은 모른다
나는 어떤 길도 믿지 않는다
뚜껑이 반쯤 열린 수채물감 속에서 길은 흘러내리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길이 있어도…… 영원히 나는 너에게로는 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시향 <2007년 봄호 재수록>
능소화 / 전태련
옛날엔 양반집에서만 키웠다는 그 꽃,
암만 봐도
한물 간 여배우 페이 더나웨이처럼
기품이 있으면서 퇴폐적인 그 여자
늘 어딘가에 기대어
힐끔 눈을 치뜨고 기웃거리는
담벼락이나 나무기둥을 낭창낭창 휘감는 만목蔓木 기질이
양반 사랑채 곁방에서 빌붙어 사는
기생첩 같은,
마이산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간 겨울 능소화
북어 껍질 같은 줄기들
가파른 直壁에 납작 붙어 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 정상을 넘보다니
껍질 / 박후기
개펄은 바다가 되기도 하지만,
꼬막이 자라는 밭이 되기도 한다
콩 싹이 껍질을 벗고 떡잎을 내밀 듯,
꼬막들도 껍질을 벌려
새 혓바닥 같은 싹을 틔운다
껍질만 남은 노인들이
호미처럼
등을 구부려 꼬막을 캐고 있다
가끔
새가 날아와 꼬막을 쪼아 먹기도 하고,
껍데기만 남은 꼬막이
자식들이 속만 파먹고 내버린 가난한 노인들과 함께
쓸쓸한 바닷가를 떠다니기도 한다
바다 070 / 권주열
저렇게 푸른 골대는 처음이다. 온통 출렁이는 그물. 경기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해변을 서성이는 관중, 다시 노란 달이 골속으로 팽팽하게 처박힌다. 순간 휘청대는 골문, 하지만 여전히 득점은 알 수 없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대체 이 경기는 언제 끝나나, 그 골대 속으로 또 한 무리의 별이 쏟아지고 비가 내리고 간간이 방파제에 가지런히 신발 벗고 골문을 향해 돌진하는 저 위험천만의 결심까지, 하지만 아무도 그 경기를 따지지 않는다. 아무도 현재 스코아를 묻지 않는다. 그저 침묵할 뿐, 그 사이 사이 갈매기만 화들짝 �사이드! �사이드! 호루라기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
참 큰 가방 / 권주열
강동 바닷가 마을에는
참 큰 가방이 하나 있다
지퍼 같은 수평선을 열면
멸치 가자미 꽃게 고래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가끔은 타고 나간 배 한척 다 집어넣고 온 어부들이
신문에 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데도 그 날,
그 가방 속
가득 찬 것도 아니다
그 가방 그날, 제법 더 묵직한 것도 아니다
강동에 오면
날마다 지퍼 같은 수평선 열고
그 가방속에서 둥근 해를 끄집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 이발소 / 권주열
이발하러 바닷가에 갔다. 포구부근 그 이발소 없어지고, 날랜 가위 같은 갈매기 떼, 싹둑싹둑 구름을 자른다. 파도는 여전히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다. 의자도 없이 방파제에 앉은, 혹은 서성이던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해안 쪽으로 날리고 있다. 그는 제자리에서 꽤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성실했다. 단발머리의 해안부터 가리마 곱게 탄 수평선까지, 하지만 그가 깎아대는 것은 바다뿐 아니다. 칠 벗겨진 하늘 유리창 너머 맨대가리의 보름달도 보인다. 그 보름달 부근 기계충 같은 별에도 가끔 바리캉 들이대지만, 평생 제 머리 못 깎는 저 출렁이는 장발.
파도 212 / 권주열
손바닥보다 작은 파스는 좀 더 크게 만들어져야 한다. 어른 손 한 뼘 정도 되는 파스는 정말로 더 크게 만들어져야 한다. 바다에 살면 다 안다. 수협직판장 앞에 쪼그려앉아 깻잎과 초장을 파는 할머니의 시린 무릎에도 시방 멸치를 터는 뱃사람들의 결린 어깻죽지에도 한 장씩 붙여대지만, 허구한 날 해안까지 우우우 밀려와 방파제에 깨어지는 저 타박상! 물의 어깨, 물의 무릎, 물의 가슴팍에, 한번 쯤 커다랗게 붙여주고 싶은.
파도 055 / 권주열
바다는 새벽부터 시동을 걸고 있다. TV를 보는 동안에도 아니, 밤에도 낮에도 오늘처럼 흐린 날에도 시동을 걸고 있다. 항구가 환히 보이는 베란다 그 유리창 너머는 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발, 불발인 구형의 바다. 크르릉 크르릉 목 쉰 기계음 사이로 간간이 바람이 석유처럼 흔들릴 뿐, 인적 드문 방파제를 붙들고 수천 수억만 년 시동을 걸고 있는 저 소리, 바다 한 척 언제 떠나려는가.
자의와 타의의 발견 / 안효희
전신에 부목을 맞댄 부동의 자세는 외롭다 흔들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접고 있을 때, 지구의 중력 같은 유혹 사방에서 당긴다 삶과 죽음으로 팽팽한 나대지 잡초 위엔 늘 바람이 분다 톱니 맞물리는 유혹 속에서, 세상을 견디는 어깨가 떨린다 밤마다 쏟아지는 별빛처럼 흔들리는 유혹과 흔들리지 않는 유혹이 치마폭에 쌓인다 윙윙거리는 것은 모두 갈등이라 단정한다 강가, 등을 기댄 버드나무는 흔드는 것인가 흔들리는 것인가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우산 / 박연준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수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러나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2007년 창비
목련꽃을 보라 / 김충규
밤사이 목련나무가 활짝 꽃 피웠다
우리 잠든 깊은 밤, 천상의 물고기 떼가 내려와서
주둥이로 멍울 어루만졌던가
뭉쳐 있던 멍울들 다 터져 꽃이 되었다
너무 희어서 실핏줄이 환한 꽃,
몇 올의 실핏줄 터져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꽃,
멀리서 찾아온 바람이
단내를 꽃잎마다 적셔준다
목련나무 너머는 콘크리트 골목길,
골목길과 목련나무 사이엔
교과 같은 담벼락이 서 있다
이런 날은, 교과서는 아예 펼치지 말자
이런 날은 지짐이 한 접시에 막걸리 두어 잔,
흥얼흥얼 콧노래에 취해 보자
그런들 내 속에 맺힌 멍울들 터지겠냐마는,
터져 환한 꽃 되겠냐마는.
木蓮 / 박주택
어둠을 밀어내려고, 전생애로 쓰는 유서처럼
목련은 깨어 있는 별빛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는다
저 목련은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목을 가까스로 세우고
희디흰 몸짓으로 새벽의 정원, 어둠 속에서
아직 덜 쓴 채 남아 있는 시간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으로부터 헤쳐 나오는 꽃잎들이
겨울의 폭설을 견딘 것이라면, 더욱 더 잔인한 편지가
될 것이니 개봉도 하기 전 너의 편지는
뚝뚝 혀들로 흥건하리라, 말이 광야를 건너고
또한 사막의 모래를 헤치며 마음이 우울(憂鬱)로부터
용서를 구할 때 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똥거리다 힘이 뚝 떨어지고 나면
맹인견처럼 나는 이상하고도 빗겨간 너의 그늘 아래에서
복부를 찌르는 자취와 앞으로 씌어질 유서를 펼쳐
네가 마지막으로 뱉아 낸 말을 옮겨 적는다
목련나무 / 최기순
목련나무는
그 집에 일 년에 한 번 불을 켠다
사람들은 먼지가 쌓여 어둠이 접수해버린 그 집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목련꽃이 피어있는 동안만 신기하게 쳐다본다
목련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타고 놀던 목마와
버려지는 낡은 의자
플라스틱 물병과 그릇들
장난삼아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던 손과
방충망이 저절로 찢어지던 소리
늘어진 TV안테나 줄을 타고
근근이 피어오르는 나팔꽃을 뒤로하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아파트를 바라보는
기대에 찬 시선들을
드디어 두꺼비집 뒤에서
도둑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집이 삭은 관절을 스스로 부서뜨리며 우는 것을
제 그늘에 몸을 숨기고 다 보았을 목련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미친 듯 제 속의 불꽃들을 밀어 올려
저렇게 빛나는 불송이들을 매달았을 것이다
상자들 8 / 이경림
그러니까 나는 그 상자들의 도시에서 한 상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다시 쬐끄만 상자들을 낳았던 거죠
날 새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괴상자들이 막무가내 배달되어 왔죠
깨알만한 것들이, 집채만한 것들이
물렁물렁한 것들이 딱딱한 것들이
필시 수세기를 달려왔을 그것들이
엄마 엄마 부르며 벌컥 벌컥
문을 열어 젖혔죠
그 때 나는 매일 부엌에서 그것들의 먹이를 만드느라 바빴죠
그것들이 자라 낙타가 되고 치타가 되고 악어가 되고 물뱀이 되어
꼭 저 같은 것들을 뒤집어쓰고 어디론가 떠날 때까지
이런 봄날 하릴없이
잿빛 허공에 귀를 대고 있으니
목울대를 늘이고 귀신 소리로 우는 그것들의 울음이 들리네요
그러면 문득
앞뜰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때 이른 목련이 솟구쳐 오르죠
글쎄 저 앙바툼한 나무 한 그루가 함뿍
희디흰 이파리 나풀거리는 여린 상자들을 매달고 달그락거리는 거리잖아요
낙타... 치타... 악어... 물뱀... 들이 가지마다
글쎄!
봄은 전쟁처럼 / 오세영
늦바람 무섭다더니. 겨우내 적멸로 돌아가리라, 일제히 한 잎마저 벗고 동안거에 들었던 나뭇가지들 입춘 지나, 우수 지나 웅성 꿈틀거린다. 저, 저, 어느새 툭 불거진 눈방울 두릿두릿한 산수유 좀 보게. 살 오른 목련 봉오리 봉긋한 털가리개 좀 보게. 진달래 영산홍 아뜩한 입술부터 샐쭉. 적멸보궁이 눈앞이라도 못 참겠네 못 참아. 여든 살 삭정이도 무릎을 일으켜 세우다 우지끈! 큰일났네. 산 너머 전쟁이 온다네. 울긋불긋 아롱다롱 아무도 안 죽고 무덤마저 살아나는 전쟁이 온다네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 김성수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목련나무 아래로 가다 / 최을원
그곳에 목련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노래의 잔뼈들만 떨어져 쌓이고
우연처럼 바람이 불면
녹슨 목련꽃잎보다 더 빨리 지고 싶었네
노을 속으로 도시가 서둘러 가면
지친 노래가 터덜터덜 고샅길 내려갔었네
그런 날 밤마다, 하숙집 낮은 창을
밤새 두드리던 그 목련나무,
대책없는 젊음이 파지로 싸이고 나서야 잠들던 새벽녘
꿈은 폐비닐처럼 찢겨 담벼락에 꽂힌
병 조각 끝에서 펄럭거렸네
지금도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화라락, 화라락, 꽃잎 지는 소리 들리네
떨어진 자리마다 붉은 녹물이 배이네
몇 개의 낯익은 거리들이 순례자처럼 찾아오면
오래된 노래가 주섬주섬 대문을, 또 나서네
木蓮 / 김경주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웹진 <문장>2006년 5월호
하얀 목련 / 김옥남
방금 기도를 끝낸
하얀 성의의 천사들이
꽃등불을 밝히고
삼월의 뜰을 걸어 나왔다
하늘을 향해
목울대를 곧추 세우고
꽃송이 송이마다
볼을 부풀린 것이
지휘봉을 휘두르는
바람의 호흡 따라
지금이라도 곧
봄을 찬양하는 합창을
시작할 것만 같다
목련 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 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 온천이 나온다.
시집 <목련전차> 2006년 창비
목련 / 심언주
쪼끄만 새알들을 누가
추위 속에 품어 주었는지
껍질을 쪼아 주었는지
언제 저렇게 가득 깨어나게 했는지
가지마다 뽀얗게 새들이 재잘댄다
허공을 쪼아도 보고
바람 불때마다
촉촉한 깃을 털고
꽁지깃을 치켜 세우고
우왕좌왕 서투르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벌써 바람의 방향을
알아챈 눈치다
시집 <4월아, 미안하다 > 2007년 민음사
꽁무니 / 심언주
알타리무들이 내 앞에
길을 놓고 간다
엉덩이 흔들며 아스팔트 길을
내려놓고 간다
얼마나 급했던지
속옷도 못 챙겨 입고 간다
텃밭에는 늦게 나온 해가
헐렁한 구덩이를 쓰다듬고
해산한 듯 곯아떨어진 흙들을 쓰다듬고
구름은 구름을 부풀려 솜이불을 짓는다
나무는 나무를 부풀려 모빌을 흔든다
알타리무들이
무 무 무 무
눈도 코도 없는 아이들을
낳으며 간다
시집 <4월아, 미안하다 > 2007년 민음사
4월아, 미안하다 / 심언주
4월아, 미안하다
진달래꽃들에게 더 미안하다
펜을들고 더 미안하다
3월을 지나온 바람아, 잘가
K 시인에게 부칠 편지 끄트머리에
3월이라고 썼다가
'3'자와 '월' 자 사이에
+1을 끼워 넣는다
3 + 1
3은 귀만 같은데 1은 무심히
귀를 베는 면도날
사과 엉덩이를 베는 시큼한 칼날
개미허리 위 구둣발
아래 봄은 피는데
브래지어 곁 넥타이
사이 꽃은 피는데
쉬잇 쉿
말을 쪼개고
구름을 가르고
입술 앞 검지가
너를 겨누고 있는 중이다
미안하다
남산 끝
4월 하늘아
시집 <4월아, 미안하다 > 2007년 민음사
봄비 /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사토(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게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시집 - 흰꽃 (2006년 문학동네)
적멸 / 정한용
스무 해 전에 보낸 편지에
스무 해 지나 메일로 답이 왔다
알 수 없는 일, 겨우겨우
가는 목숨을 어찌어찌 이어오던 난 화분에
꽃이 달렸다
모든 목숨은 물같은 그리움이거나
빈집을 흐르는 울림이거나
상처의 흔적이거나
어머니 / 정숙
바람은 늘 호수 주위를 자발없이 맴돌았심더
때론 살갑게 물민경을 간질이며 소소리바람으로
새살대다가 때론 잔잔히 꿈꾸는 가슴에 간대로
뒤바람 거센 파도를 일으켜 세워 호수가 간직한
거를 다 한꺼번에 헝클어버릴 기회도 엿봅니더
미소짓는 내 얼굴 흉측하게 일그러뜨리고
춤추는 포플러 가지 모지르고 큰 기침하는
비슬산마저 뭉개고 푸른하늘까지 쪼갈쪼갈
찔락거립니더 그래도 호수는 그 모든 것
말없이 받아들이며 다독다독 자신을, 바람을
진정시킵니더 먹구름잔뜩 짊어진 하늘
화살거치 내려꽂히는 빗줄기, 지친 초록의 낙엽
꺼정 가슴에 품어줍니더 바람의 변덕 지 암만
팥죽 끓여도 흔들리는 거는 그 그림자들일뿐
가슴 밑바닥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는 호수는
태산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심더
오! 어무이, 어무이예
- 호메도 날이언 마라난 낟가티 둘리도 업스니이다 <사모곡>
시집 <위기의 꽃> 2002년 문학수첩
두 시인 / 마경덕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난
이생진, 서정춘 시인
섬 시인과 죽편의 시인이 담소를 나눈다
물새울음과 대숲 맑은 바람이 어우러진다
늘 안개에 덮여 무심히 스쳐간
추자도에서 제주도로 넘는 뱃길
어느 쾌청한 날, 시퍼런 물밑에서
마흔 개의 섬이 불끈불끈 치솟아
그 비경에 무릎을 쳤다는 이생진 시인
듣고 있던 서정춘 시인
한 마디 던진다
어허! 바다의 죽순이네
고백 / 이승훈
난 시밖에 쓸 줄 몰라요
벽에 못도 박지 못하고 벽에
못을 박을 때는 망치로 손가락을 때리죠
잘 웃을 줄도 모르고
눈이 나빠 해질 무렵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죠
생계는 아내가 꾸려가고
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요
그러나 무얼 가르치는지 몰라요
월급이 얼마인지도 몰라요 월급은
아내가 맡아 살림에 쓰고
난 잡비를 받죠 해질 무렵
은행에서 돌아온 아내가 잡비를
책상에 놓고 나갈 때가
제일 좋아요
나 시 밖에 쓸 줄 몰라요
정신과표현 (2007년 3~4월호)
앵두가 뒹굴면 / 김영남
잎 뒤 숨어있는 사연들
일러바칠 곳 없는 동네
우물 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
애지 (2006년 겨울호)
언덕에 복송꽃 피니 / 김영남
수남 아재는 염소 끌고
경자 누나는 바구니 흔들고
완이 당숙은 남도 창 한 가락을 뽑고
좋겠네 들길은
모두 일 나간 집 대문
우체부 아저씬 기웃거려도 되겠네
탱자나무 울타리 가에 서서 나도
색연필 한주먹 쥐고 상상하겠네
언덕 위 저 화려한 포옹
포옹이 불러내다 숨기는 것들을
개처럼 하루도 어슬렁어슬렁 거리겠네.
실천문학 (2007 봄호)
가을 파로호 / 김영남
저 호수, 호주머니가 없다
호주머니 없으니 불편하다
뭔가 넣어 맡겨둘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덜너덜한 생각도 거두고 싶은데
심플 젠틀 모던 이런 단어들이 지나간다
내가, 호주머니 되어보기로 한다
호주머니가 되어 호수의 거추장스런 손들을
모두 한번 거두어주기로 한다
갑자기 호수가 사라진다
거기에 나는 맡겨본다
윤동주 시구 하나
노자의 역성(易性)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내게 누가 쪽배를 띄운다.
신생 (2007 봄호)
건달의 슬픔 / 고영
술꼭지가 돌아 들어온 날 아침
그녀가 식탁에 앉아 햇양파를 까며 운다
아침 햇살이 맵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맵다
저렇듯 눈빛이 매운 날은
시원한 냉수 한 잔도 간밤의 소주처럼 쓰고 맵다
경험에 의하면 그녀는 지금
까딱 잘못 건그리면 터지고 마는 프로판 가스통처럼
몹시 위험한 상태다
연민으로 지은 잡곡밥, 눈물로 무친 시금치 나물, 한숨을 넣은 장조림,
원망으로 끊인 북어국, 독약이 발라졌을지도 모를 꽁치구이…
그런데 꽁치 대가리는 어디로 갔나
어두육미,
어두육미를 읊조리며
마치 수라상을 받은 것처럼
최대한 황홀하게, 최대한 맛있게 밥공기를 비우는데
눈치 없는 젓가락이 자꾸 미끄러진다
젠장, 기어이 올 것이 왔는가
맵고 뜨거운 눈빛만 남기고 한 무리의 가방이 현관을 나선다
자기야, 가니? 정말 가는 거니?
젓가락을 놓고 잡으려는데
우드득 돌이 씹힌다
현대시 (2006년 9월호)
몸관악기 / 공광규
뒤축이 다 닳은 구두가
살이 부러진 우산을 들고 퇴근한다
당신의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요!
나이 어린 사장의 말이 뼈아프다
망가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슬픔의 나이를 참으라고 참아야 한다고
기운 어깨를 다독거린다
너, 계속 이렇게 살거야?
심란한 비바람이
넥타이를 움켜잡고 흔들어댄다
빗물이 들이치는 낡은 포장마차 안
술에 젖은 몸관악기가
악보 없이 운다
<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
밤비 / 오진현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 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푸른 밀밭 / 오남구
환한 대낮
활활 옷을 벗고 뛴다
키 큰 내가 뛴다
키 작은 내가 뛴다
적당한 내가 뛴다
어우러졌다가 어우러졌다가
일렬로 서서 뛴다
푸른 밀밭
부드러움의 단상 / 오남구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봄비가, 몰라! 몰라! 몸살친다 / 오남구
관악산 까치고개에
피리리- 새소리가 간다.
반짝이는 물방울 아픈 햇빛이다.
상수리 나무의 붉은 잎들의
아우성 풍금소릴 듣는다.
간밤엔 남해의 바람일지
버들가지의 잎겨드랑이마다
흰 고기떼들이 파도를 친다.
가늘은 몸짓 봄비가
몰라! 몰라! 몸살친다.
피리리- 새소리가 가고
파아라니 피가 돌면 피가 돌면
깍! 깍!
몇 점 꽃이 빛났다.
마라도 / 오남구
- 즉물 판타지11
제주도 앞 바다에
내 눈썹을,
물길 수평선 위에 놓고 가니까
섬은 이미 그리움 덩어리다
내 눈썹이 가서 닻을 내린다
물거울 속의
마라도, 꽃 비치는 땅끝
수평선 위에서 푸르게 씻긴다
끼룩, 땅끝! 끼룩, 땅끝!
갈매기가 울어댄다
깃발이, 멀리에 오키나와를 놓고
앗싸 앗싸 파도가 온다
내가 눈썹을 싣고 나오자
빈 섬이 하나 떠 있다
생강나무 / 정우영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홍역 / 강미정
목련나무는 맨 아랫가지가 먼저
꽃등을 밝혀 들고
윗가지로, 윗가지로 불을 옮겨 주고 있다
불씨를 받은 꽃봉우리들
타오르기 시작한다 활짝, 화알짝
홍역앓는 몸처럼 뜨거운 꽃
눈물난다
저렇게 생을 채우라고
뜨겁게 우리의 생을 채우려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움은 올라온다
맨아래 가지에서부터
가슴 속 뜨거움을 받아내는 꽃
아픔을 삭히는 화근내처럼
꽃도 제 몸을 태우는 향기가 난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뜨거움 때문에
뜨거움이 채우는 저 생생한 생 때문에
시집 - 상처가 스민다는 것 (천년의시작)
불룩한, 봄 / 강미정
반으로 가른 봄배추 속에는 꽃대가 꽃망울을 송송송 단 채로 쪼개져 있다
눈물을 흘리며 썰던 대파도 꽃대 속에 꽃망울을 알알이 박아 놓았다
뱃속에 이렇게 많은 알이 슨 것을 보니,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고 뚜룩뚜룩 쳐다보는 것을 보니, 몸 속, 무늬가 졌겠어,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깊은 길이 났겠어, 생선 배를 가르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봄에는 왜 이렇게 알 밴 것들이 많을까,
배란기 때마다 체온이 올랐겠지, 입덧으로 신 음식이 먹고 싶었을 거야, 낳을 때까지 먹고 싶던 홍옥 한 알처럼, 입이 달았을 거야, 생각했다
그래서 봄만 오면 바람이 단가, 살갗이 툭툭 갈라지며 저렇게 꽃이 피고 몸 속, 지울 수 없는 무늬가 지는가, 배가 불룩해지는가,
목이 메어왔다
산더미만한 배를 안고 다리가 퉁퉁 부은 임신중독증의 그 여자가 신발 밑창 자르는 일을 부업으로 한다면서 끓여내오던, 그,
야, 배고프면 잠도 안 오잖아, 물기 고인 눈으로 웃던, 그, 봄,
벚나무 / 강미정
한 번은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의 오줌을 받아 주어야 했다
환자는 소변기를 갖다대기도 전에 얼굴이 뻘개졌다
덮은 이불 속에서 바지를 내리자
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그것,
나도 얼굴이 빨개졌다
이불 속에서 소변기를 걸쳐놓고
그것을 잡고 오줌을 눌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안한 눈은
창 밖 벚나무 가지 위로 오르는데
벚나무도 뜨겁게 솟구치는 제 속을 받아내는지
펑펑 눈부신 소리로 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
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던 햇빛이
후딱 일어나 수천 개의 혀를 내밀더니
내 눈을 휘감아 가버렸다
놀란 나는 캄캄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벚나무 아래에서 와와, 숨 멎는 소리만
내 눈에 고였다가 넘쳐흘렀다
그날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내내 돌아누워
밥도 먹지 않았다
진달래 화전을 기억하다 / 전정아
앞산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꽃봉오리마다 불씨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성냥을 확 그은 듯 꽃망울이 탁탁 터진다
나는 상비약처럼 보관하고 있던
녹빛 프라이팬을 꺼낸다
기꺼이 화로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진달래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기름
우리는 끈적끈적했던 날들을 프라이팬에 붓는다
지지지직, 지지지직
산 하나, 마을 하나가 향기 주머니를 푼다
꽃술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흑점 같은 기억들
앞으로 철썩
뒤로 처얼썩
뒤집기를 반복한다
내가, 산이, 작은 동네가
퍼져 나오는 향기에 노릇하게 익어간다
반죽 위로 편편하게 꽃잎을 띄운다
곧 구순기의 몸을 더듬거릴 진달래 화전
딱! 이만큼만 하겠다
기억이 너무 뜨거워졌다
들꽃 여관에 가고 싶다 / 박완호
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파리 / 박완호
종이박스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끌고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한쪽 다리를 저는 나귀처럼
도로를 무단 횡단한 노파의 휑한 머리에
파리 한 마리 앉아 있다
길가 화단에 걸터앉은
늙은 나귀의 코에서는 연신 더운 바람이 새어나온다
머리를 간지르는 파리의 장난질에도 나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몸에서 뻗어나간 가지마다 물주고 다독거리느라
젖꼭지 말라붙은 지 오래,
아직 빨아먹을 단물이 남았거든
마지막 물기 마저 다 가져가라고
나무 그늘 속으로 밀어넣는 머리 위에서는
파리 한 마리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두 손 싹싹 빌고 있다
노을 / 박완호
弔燈을 켠 차들이 안개에 무장해제 당한 도시의 새벽을 가로지른다. 行人들 한 줄로 늘어서서 달려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燈을 향해 창백하게 손을 흔든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은 서로를 문상한다. 안부를 묻는 혀가 실험용 개구리처럼 천천히 굳어 가고, 지나친 시간이 무감각하게 모래시계 속에 쌓인다. 너무 늦게 저무는 生은 불안하다고, 고속질주의 생애를 달려온 입술이 중얼거린다. 그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가 떠 있다. 키보다 한두 뼘쯤 높은 공중에 동그라미의 꽃밭이 펼쳐져 있다. 나비를 불러들이지 못하는 꽃들의 모가지를 바람의 칼날이 한차례 휩쓸고 간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출구가 급습한다. 차들은 출발과 함께 종점에 다다르고 문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죽어 가기 시작하는 신생아의 울음 가득한 분만실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붉은 비린내를 풍기며 세상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개미 / 박완호
제 몸집보다 수십 배는 커 보이는 아이스크림 조각을 물고 개미 한 마리 땅바닥을 기어간다 등뒤의 여백을 늘여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여백은 자라지 않고 녹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며 개미의 몸을 붉게 물들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미는 몸 전체가 아이스크림으로 변해간다 육체를 다 적시고 나면 정신의 들판을 흘러내릴 달콤한 액체가 늪처럼 고여 가는 동안에도 개미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막대를 물고 개미 한 마리 자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돌꽃 / 마경덕
물이 마르자 꽃이 사라졌다. 따글따글 돌 구르는 소리, 물새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저 주먹만한 몽돌의 나이는 아무도 모른다. 흐르고 흘러 먼 섬에 닿았다가 수천 년 파도에 굴렀다. 어느 바람이 손이 헐도록 바위를 쪼개고 다듬어 둥글었다. 따글따글 물에 부딪혀 모난 성질 다독여, 꽃을 피웠다.
그냥 두고 와야 했다. 저 돌멩이가 바다의 살점인 줄 몰랐다. 얼마나, 천천히, 천천히… 품고 어르고 한 숟갈, 두 숟갈, 짠물을 떠 먹여 키웠는지 미처 몰랐다. 그 아름다운 돌무늬가 돌의 마음이었다. 물이 마르니 마음도 거두어갔다.
- 유심(여름호)
된장국이 끓는 저녁 / 배한봉
대문에 어둠이 스며들고
붉게 물든 감나무 잎들 마당에 쓸린다
아내는 퇴근이 늦고
놀러나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낮에 담아둔 가을볕 한 그릇 냄비에 붓고
투명한 바람 줄기 썰어 넣어 된장국을 끓인다
내 된장국 솜씨는, 딸애가
학교 백일장에서 아빠의 된장국이라는 글로 상을 탄 적 있는
스무 살 자취시절에 쌓은 만만찮은 내공
담 너머 흘러간 전업시인의 특제 요리 된장국 냄새가
귀로의 코에 스며들어 걸음 더 빠르게 하고
어둠 이슥한 골목길 집들의 등불 더 환하게 할 것이다
하나 둘 창문에 박히는 푸른 별
꽃핀 생각으로 밥상을 장식하면
우리 집 강아지 두 마리 멍멍 뛰어다니는 가을 저녁이
삶에다 온기 섞섞 비벼 대문 앞에 세워놓는다
시로 여는 세상 (2006년 봄호)
말뚝 / 마경덕
선착장 짠물에 얼룩진 쇠말뚝, 굵은 밧줄이 똬리를 틀고 말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바다가 드나들었나. 끙차, 목에 밧줄을 휘감고 버틴 시간이 얼마인가. 투두둑 바다의 힘줄을 끊어먹은 말뚝 모가지가 수평선을 향해 늘어져있다.
녹이 슨 밑동. 벌겋게 흘린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밧줄, 단숨에 바다를 둘러매던 그을린 팔뚝, 노을에 젖은 만선의 깃발, 말뚝에 마음을 묶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철썩, 포구가 몸을 뒤트는 순간 말뚝의 영혼이 새어나간다. 수많은 이별을 치르는 동안 말뚝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선창가 말뚝에 걸터앉아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말뚝 뽑힌 자리, 깊이 파였다. 나를 맬 곳이 없다.
고백 / 정다혜
겨우내 저 혼자서만 웅크리고 살던 빈집
녹슬어버린 펌프는 녹슨 느낌표로 서 있다
안부를 묻지 않고 지내는 동안
우물가의 푸른 이끼들 누렇게 말라버렸다
오래되었거나, 잊어버린 저 문장부호들
읽기 힘든 낡은 세월의 문장이여
펌프에 마중물 먹이고 손잡이 잡고 누른다
처음 펜을 잡던 손의 설렘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 아름다운 첫 문장은 손이 먼저 아는 것
차가운 내 손에 피가 돌기 시작한다
꽃 피고 지고 다시 피는 사이
저도 꽃길 열고 싶었던 물의 침묵이
펌프 속에 갇힌 짐승처럼 괴성을 내지른다
아무도 받아 적을 수 없는 붉은 모음이
뻘건 녹물에 녹아 흘러나온다
땅속 깊은 곳의 말 다 쏟아내기 위해
내 마음에 묻힌 말 다 쏟아내기 위해
나는 더욱 힘껏 펌프질을 한다
갇혔던 슬픔이 다 쏟아져 나온 뒤
맑은 노래는 찾아올 것이다, 나는 지금
가장 맑은 물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외눈 / 정다혜
간호사는 의식 없는 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한쪽 들어내겠다는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었다
그건 동의가 아닌 최후의 통보
나는 여자답게 거부해 보지 못하고
절망의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눈 하나 잃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생의 빈자리
신경조차 차단된 죽음의 빈자리에
보지 못하는 새 눈 들어섰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풍경 담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의안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
다행히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바다 같은 눈물 출렁출렁 퍼내 쓰고도
눈물은 아직 강물처럼 남아 펑펑 흐른다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나는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다, 어느새
나의 외눈 늙은 노안의 행성 되어버렸지만
자전하는 눈의 뒤편으로 녹는 눈을 보고
공전하는 눈의 앞으로 펼쳐지는
축복의 봄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다
신록 한 잎 놓치지 않고
꽃잎 한 장 지나치지 않고
오는 봄을 온전하게 외눈에 담고 있다
오래된 주전자 / 정다혜
새로 산 유리 주전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 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 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위성 안테나 / 정다혜
그녀의 동그란 손바닥 속으로
거대한 도시가 들어갔다 나온다
백화점이 들어가고 꽃집이 나온다
자동차는 쏜살같이 달려 들어가고
사람은 구두를 신고 옷을 입고 나온다
감춘 지문이 들어가고 수많은 문장이 나온다
나도 형체 없이 하늘을 날아
저 구멍도 없는 구멍 속으로
들어 갈 순 없을까, 화려한 의상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올 수 없을까
이미 오래전 수신이 끊어진 곳
내 슬픔의 주소로 채널을 맞춰 본다
내게서 뭉텅뭉텅 빠져나간 슬픔의 대사들이
어느 채널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 슬픔들 다시 재방송되지 않는다
나의 생은 몇 개의 채널을 가졌으며
나는 지금 몇 번에서 생중계 되고 있는가
나는 동그란 위성안테나를 펼치고
텅 빈 하늘에 주파수를 맞춘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 정다혜
차 끓이다 깜박 잊고 열어놓은 꿀 병 안으로
개미 한 마리 들어가 퍼덕이더니
간신히 살아 되돌아 나온다, 다행이다
꿀에 취해 정신없이 꿀 속으로 빠져 들어가
개미는 다리 하나 잃고 돌아 나온다
달콤함과 생존 사이에서 그는 다리 하나 잃었다
속도와 몽상 사이에서 나도 몸의 하나 잃었다
다리 하나 잃은 개미 꿀을 등에 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개미는 남은 다리로
나머지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가 잃어버린 다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처에서 슬픔이 되고, 슬픔에서 추억이 될 것이다
달콤함은 누구에게나 유혹이고
꿀 병 속 같은 유혹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다시 달콤함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나는 남은 눈으로 개미를 지켜보고 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중얼거리며
시집 <스피노자의 안경> 2007년 고요아침
살구꽃, 하르르 / 마경덕
살구나무 한 그루
마당에 솥단지 걸고 밥을 짓네
끓어오른 밥물, 밥물
골목으로 넘치네
훌쩍 담 넘은 살구나무
하얀 밥풀때기 엉겼네
볼따구니 미지도록 밥알을 물고
골목을 바라보네
살구나무에 묶인
천방지축 개 한 마리
컹컹 짖네
인심 좋은 살구나무
옛다 먹어라
밥 한 술 떠서 개에게 던져주네
찌그러진 개밥그릇
꽃 이파리 떨어지네
저렇게 잠깐 꽃은 지네
꽃인 듯 내가 지네
시집< 신발론> 2005년 문학의전당
민들레 / 정병근
영문도 모르는 눈망울들이
에미 애비도 모르는 고아들이
담벼락 밑에 쪼르르 앉아있다
애가 애를 배기 좋은 봄날
햇빛 한줌씩 먹은 계집아이들이
입덧을 하고 있다
한 순간에 백발이 되어버릴
철없는 엄마들이
몸살, 찔레꽃 붉게 피는 / 오정국
그 어디서 누가
이토록 간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
난데없이 내 입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까 찔레꽃,
붉게 피는
해질녘이면
그 어딘가에서
또 다른 내가 저물고 있듯이
여태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도 풍경(風景)이 잇고
책(冊)이 있고
출렁거리는 물결이 있기에
내가 강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내 몸을 일으켜주었다 그런
이야기다 이 끝나지 않는 문장은
때때로 시(詩)가 되고
강가의 모닥불이 되고
불 결의 목쉰 노래, 노랫가락이 되어
이 마음 이리 서성거리고
그 어디서 누가
이토록 간절하게 노래를 불러
난데없이 내 몸이 이런 몸살을 앓을까 찔레꽃,
붉게 피는
시집 <멀리서 오는 것들> 2005년 세계사
소나무라는 짐승 / 송재학
나무가 토해내는 나무의 잎들이 까칠까칠하다
전기톱날이 갈당갈당한 목이 아니라
이빨인 옹이에 박히면서
밀도살꾼 형제의 후회가 시작되었다
단단한 수피 속의 짐승은 음전했지만
톱밥이 순교하는 피처럼 허옇게 튀면서
빗줄기마저 우왕좌왕이다
겨우 몸통을 넘기니까 갑자기 조용하다
너무 이쁜 짐승을 잡았네, 아우마저 심상해했다
무덤 주위가 정리되니까
소나무가 제 몽리면적을 포기했는지 앞이 잠깐 밝아졌지만
어딘가 깜깜해진 것도 알겠다
육신을 뺏긴 놈이 여기저기 똥을 눈 듯 송진 냄새가 진하다
사람의 안에만 짐승이 도사린 것은 아니라는 하루!
'좋은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0) | 2010.07.14 |
---|---|
07좋은시 맛보기3 (0) | 2007.06.19 |
07좋은시 맛보기 2 (0) | 2007.06.19 |
07좋은시 맛보기 1 (0) | 2007.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