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꾸리蘭 / 이해리
베란다 화초들 중에
가장 볼품 없는 도꾸리蘭
언제 꽃 한 번 피운 적도 없고
이파리란 것이 꼭
빗다 만 머리카락처럼 부스스한 그것에게
날마다 물뿌리개 기울여 뿌린 물은
물이 아니라 무관심이었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른 잎 뜯어주려 손 내밀자 순식간에
쓱싹,
손가락을 베어 버린다 뭉클
치솟는 핏방울 감싸쥐고 바라보니
시퍼런 칼을 철컥,
칼집에 넣고 있었다
때미는 철학자 / 이해리
교수면 뭐하고 박사면 뭐 하능교
때 잘 나오고 팁 많이 주는 손님이 최고지
수성하와이 목욕관리사 아줌마들
철학자다, 필기구와 서책 없이 활딱 벗은
맨몸으로 체득한 때의 철학
단순 명쾌한 결론이 놀랍다
때 밀어 보믄 안다카이, 그 사람 성격, 신분 재력, 취미까지 다 보인다카이 몸매 이뿌고 맘씨 곱은 사람은 때도 수밀도처럼 수월한데 심술 사나운 심뽀에 인색해 빠진 몸띵이들은 때도 눌은 양철냄비 맹키로 애 믹인다카이, 그런 손님 만나믄 오뉴월 염천에도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야 일 할 수 있다카이
수증기에 쪄진 허벅지 트실트실 튼 살갗이
가문 고향의 논밭보다 아득한 자신의 몸은 볼 줄 모르고
발가벗은 남의 때에서 가득 껴입은 무엇을 통찰하는
쓸쓸하도록 단순한 결론이
내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고로쇠나무 / 배우식
그녀가 지리산 비탈길에 서 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온
굶주린 봄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세차게 친다
그녀의 물살이 빨라지고
굶주린 물고기는
그녀의 뼈 속을 뚫고 지나간다
몸 속 깊이 열쇠를 밀어 넣은
굶주린 물고기가
그녀의 허리띠를 풀어헤친다
뇌관 같은 울먹한 슬픔위로
욕망에 굶주린 물고기가 내려앉는다
그녀의 밑동이 쩍 갈라진다
여자의 젖은 혓바닥이 뚝 떨어진다
물소리 흐르는
붉은 구름 하나가 혓바닥에 걸려있다
모자이크 / 박건호
- 심장병동에서
얼마 전에 가슴 뼈를 톱으로 자르고
심장으로 통하는 두 개의 관상동맥을 교체했다
옛날 같으면 벌써 죽어야 했을 목숨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어릴 때는 생각이나 했던가
팔이 부러지면 다시 붙듯
목숨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사금파리를 딛어 발이 찢어졌을 때는
망초를 바르고
까닭없이 슬퍼지는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커가면서 계속 망가져 갔다
오른 쪽 수족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일어나고
아무 잘못도 없이 시신경이 막히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설상가상
어릴 때부터 아파오던 만성신부전이 악화되어
콩팥도 남의 것으로 바꿔 달았다
누구는 나를 인간승리라고도 하지만
이건 운명에 대한 대반란이다
신이 만든 것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인간이 고쳐 만든 모자이크 인생이다
그렇다고 나를 두고
중세기 성당 벽화를 생각하지는 마라
모자이크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너희들은 모른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서
톱으로 자른 가슴 뼈를 철사줄로 동여 매고
죽기보다 어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구소련 여군 장교같은 담당 간호사도 모른다
밤새 건너편 병실에서는
첨단의학의 힘으로 살아나던 환자가
인간의 부주의로 죽어 나갔다
나는 급한 마음에 걸어온 길을 돌아다 본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깃발 / 박건호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끝내
어느 한 쪽은 찢어져야
안심할 수 있는
우리의 산하
하늘에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별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는
하나 뿐인데
사람들은 가슴속에 활화산을 숨겨 놓고
천둥소리를 숨겨 놓고
우주질서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념과 사상이
피보다 진했던 우리의 반세기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오리고기 앞에서 / 박건호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오리고기를 보면서
세 명의 평화주의자가 군침을 흘린다
생명의 존엄성을 얘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상추에 싸서 먹을까
얇게 썰어 놓은 무에 싸서 먹을까
그냥 소금에 찍어 먹을까
아주 탐욕스런 계획들을 하고 있다
그들의 양심은 고기가 익으면서 끝나고
모든 누명은 술이 뒤집어쓴다
이 거룩한 사나이들은
눈동자에 피빛 노을이 물들면
절벽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를 그리워한다
목숨을 끊으면서 항거했던 울분은
강물에 씻겨갔나
한 나라가 망한 것을 천년 뒤에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절벽으로 몸을 던진
삼천 명의 궁녀들만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천 점의 고기가 되어
군침이 흐르게 할 뿐이다
게의 속살을 파먹으며 / 박건호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은
무엇인가에 부딪치면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틈 사이로 들어와
누군가 나를 파먹는다
단단한 껍질을 믿었으나
단단한 껍질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연습도 없이
나는 허물어졌다
허물어지고 허물어졌다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아닌
어떤 제국의 힘으로도
우리의 속살은
보호할 수 없음을
왈/ 박건호
나는 유행가 가사를 썼다
돈이 될 것 같아서
첫사랑의 여자를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
그 사이 여러 명의 신인가수가 탄생했다가 은퇴를 했고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가사를 써 준 사람들 앞에서 침을 겔겔겔 흘리다 보면
무엇인가 자꾸 더러웠다 더러워서
더럽지 않은 곳을 찾다가 그만 똥을 밟았다
그때 어떤 시인이 왈
내가 쓴 시는 요즘 쓰는 다른 시의 경향과 다르고
시대적 감각이 뒤진다고 말했다
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시
유행가 가사를 썼다
작곡가들이 너무 시적이라고 한다
다시 시를 썼다
시인들이 너무 유행가 가사적이라고 한다 젠장
짖어라
왈
오렌지 나무를 오르다 /전정아
뿌리 앞에 서면 들린다 물관 깊이 물 흐르는 소리, 나무 위를 오르는 치어 떼들의 아가미 여닫는 소리, 설익은 비린내가 가지 끝에서 대롱인다 나는 잠 속에 빠져 있는 등본을 깨워 주소를 받아낸다 산 1리 2번지여 안녕? 대추나무 가지가 담벼락에 팔을 뻗고, 마당에선 백일홍이 쿨렁인다 옷자락 비비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 더럭 신발을 들춘다 한 무더기의 별들이 진분홍 빛 잇몸 드러낸다 창을 열어 젖멍울을 익히던 소녀, 거취 불명 같은 사춘기의 문을 빠져 나와 창을 두드리면 카나리아가 노래를 흘리고, 바게트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변성의 소리를 가진 짝사랑의 남자와 동거하던 일기장, 주홍빛 알전구가 속살 붉힌다 치어 떼를 품은 껍질은 단단하다 입안 가득 넣으면 톡톡 단물 터뜨리는 푸르른 날들, 오렌지 나무를 오르면 나는 백 촉의 오렌지로 불 켜진다
-詩로 여는 세상 <2007년 여름호>-
북어 / 배우식
사람한테 잡혀가도 입을 크게 벌리고만 있으면 산다고 아버지한테 귀 닳도록 들었습니다. 사람한테 잡혀가도 눈만 크게 부라리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겁먹고 도망간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도망간다고 아버지한테 귀빠지게 들었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 하나 깜박대지 않고 크게 뜨고 있는 내가 무섭지요. 벌벌 떨리지요?
슬픈 약속 / 배우식
울지 마세요 어머니 금방 갔다 올게요 금방 갔다 올텐데......울지 말고 웃어주세요 저처럼 환하게 웃어달라니까요 저를 웃음의 모종컵에 꼭꼭 눌러 심어주세요 아침마다 웃음을 뿌려주면 쭈욱쭉 넝쿨 뻗어......금방 갔다가......금방 올 수 있어요 걱정마세요 가다가 배고프면 먹을 수 있도록 빨갛게 잘 익은 웃음 몇 알 싸주세요 제 몸이 펄펄 끓어요 더 이상 말 할 수가......없어요 어머니 금방, 금방 갔다 올게요 알았죠 약속할게요 안오면 혼내주세요 네? (만일, 혼수 속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어머니.....울지마세요)
불꽃의 시간 / 이수익
관현악이 일제히 숨을
멈추자
바이올린 독주자는 발끝을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한 음계를 오르내린다.
그의 심장과
폐, 내장이 먼저 불붙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그의 온몸이 송두리째 화염으로 타올라
무대 위에는 유일신처럼 독주자만 있을 뿐,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없다.
격렬한 조명 앞에 하얗게 노출된
그는, 순교자처럼 비장하다.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없는 발걸음을 디뎌
완벽하게 죽음의 벼랑 끝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펄럭이는 불꽃
그늘이
침묵하는 청중들의 가슴 위로
철렁, 내려앉는다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 / 이수익
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
쉽게 떨어졌지만
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
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틈 / 이수익
문틈 사이로
처음엔 너무나 아귀가 잘 맞아서
좋은 궁합이었던 문틈 사이로
어느새
틈이 벌어졌다. 화해가 먹혀들지 않는다.
둘 사이를 힘껏 끌어다 붙여도
절대, 다시는,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부리는 심술
별거(別居)의 틈새가 사납다.
영원히 함께! 약속으로
입맞춤할 수 있는 일 아무 것도 없다.
눈부시게 천년 누대(千年累代)를 떠받쳐온 종탑도
수백만 년 견뎌온 저 산 암벽덩어리도
결국은
균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이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날 피로써 사무쳤던 붉은 인연이여!
맞이하자, 기꺼이,
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시간이 밀어내고 있는
우리 사이 슬픈 틈새를
길일(吉日) / 이수익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년 천년의시작-
살얼음 / 조영석
몇 년째 물을 품고 있는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던 물의 거죽이
주름진 채 굳는다. 이빨이 없는 거대한 아가리에
발을 얹는 곳마다 거미줄이 퍼져나간다.
얼음 속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이 흐른다.
흐르면서 얼음 바깥을 염탐한다. 가벼운 먹이는
그대로 놓아주고 한 번에 먹어치울 큰 놈을
조용히 기다린다. 저수지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살얼음은 물의 덫. 해마다 한 명씩은 꼭
끌고 들어가고야 마는, 네발짐승은 절대 걸리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살얼음이 기승을 부리는 때
결코 저수지에 가지 않는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얼음은 조금씩 두꺼워지며 아이들을 부른다. 밤마다
굶주림에 쿨럭이는 물소리가 마을을 휘감는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쓴 채 잠을 설치고 어른들은
밤새 물을 밝혀 얼음의 아가리를 살핀다.
살얼음은 그러나, 기어코 한 번은 먹이를 끌고 들어간다.
제 분을 못 이겨 속으로부터 꽝꽝 얼어붙기 전에.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는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
저수지에는 종일 진눈깨비가 날리고,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놓고 울음 없는 위령제를 지낸다.
해마다 한 번씩은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두루마리화장지 / 김 륭
공중화장실 벽에 걸려있던 두루마리화장지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바닥 칠 수조차 없던
나무의 나이테가 풀렸다
구른다, 또르르 삼겹살 몇 근으로 끊어내지 못한 나무의 뱃살이
수백 수천 장 푸른 손바닥에 새겼던 바람의 귀엣말이 신발처럼 벗겨진다
꼼지락꼼지락 발가락으로 움켜쥐고 살았던
혓바닥이 구른다
동그랗게 말린 바람의 혓바닥이 핥아 먹어버린 나무의 시간 속으로 천둥벼락이란 뒤 마렵던 구름의 말, 혀가 짧아 말이 되지 못한 새는 푸드덕 날개라도 풀어 쓰- 으-윽 내 깊고 어둔 똥구멍 닦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도대체 나무는 급한 볼일을
얼마나 참은 것일까
두루마리화장지보다 함부로 풀어썼던 내 혓바닥이
펄쩍펄쩍 뛴다
입맞춤, 혹은 상처 외 4편 / 강인한
나는 확신한다
이 느닷없는 입맞춤이
나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너를 가만히 끌어올리고
한 개의 작은 달걀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플루토에서 온 이 얼굴을 바라본다
스무 살 성처녀, 네 머리칼에서
희미하게 라일락 향기가 떠돌았고
더운 내 입술은
너의 눈 위에 포개졌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새가 날아갔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나무의 기억에 대하여 / 강인한
길게 부저가 울리고
자궁에서 태아가 밀고 나오듯
지하 차고에서 불끈 올라오는 차가 보인다
이 밤에 어디로 가려는가
갈 데 없는 우산나무들이 비에 젖는다
차선과 신호등이 거미줄로 목을 죄는
주소불명의 캄캄한 거리에서
나도 그렇게 헤매인 날이 있었다
사랑이여
내가 그대에게 드릴 것은 빈손뿐일지라도
우리 둘이 참새처럼 걷던
잎 진 나무들의 짧은 숲길,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은빛 물결과 빛나는 햇살을 기억하나니
홀로 눈뜨는 밤마다 그대의 안부가 그리워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핏덩이 같은 것, 한 덩이 검은 침묵 같은 것
사랑이여
눈이 맑은 이여
비 맞는 검은 가지마다 환하게 등을 밝히기 전
목련나무는 한참을 더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만 한다
낯선 시간 앞에서 / 강인한
낯선 시간 앞에 서 있다
네가 벗어놓은 그림자가
여기 있다
카페모카의 오후 세 시, 달콤한 수요일
생크림으로 추억은 장식되었으나
이 추억은 치명적이다
내 앞의 빈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너의 그림자는 타르보다 쓰고
낯선 시간을 마주한 나는 시력을 잃는다
갑자기 초라해진다
봉인된 시간 속에서 나는
기억해 내고 싶은 것들을 찾아낸다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너의 얼굴을
조용히 들어올린다
내 손에 남은 봄 / 강인한
부드러운 능선의 칼금을 문 하늘 위로
제비가 왔다, 생일이면
내 전생에 상제의 딸을 엿본 죄로
여기 서서
담 너머 눈부신 향기가 날아오고
영롱한 구슬소리가
종일토록 늙은 벚나무 꽃잎을 털어
목욕을 마친 그대 속살의 분홍
그대 속살의 향긋한 흰빛을
다 비춰줄 때까지
기다린다
후생의 내가 살아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설고
오랜 기다림에 목이 말라
자꾸만 거울을 보는데
뒤꼭지 까만 밤이
발을 적실 듯 길게 흘러나온다
사랑이여, 펼치고 펼쳐서
내 손에 남은 봄이
이제 많지 않다
늦은 봄날 / 강인한
간장 항아리 위에
둥근 하늘이 내려오고
매지구름 한 장
떴다가
지나가듯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가끔은 내 생각도 하는지
늦은 봄날 저녁
머언 그대의 집 유리창에
슬며시 얹히는 놀빛
모닥불로 피었다가
스러지듯이
-계간 <시안>2007 여름호-
빛에 휘다 / 정병숙
스산한 가을부두에 서 있었네
세찬 바람이 삼길포에 닿기 전
거친 물살로 뱃머리에서 출렁였네
보는 이 없어 철퍼덕, 선창가에 앉아
내게 달려드는 파도를 밀쳐내고 있었네
드문드문 떠 있는 새우잡이 배들에게
내 눈물을 고루 적재시켰네
마른 생선 대가리처럼
부석부석 물기 없는 눈언저리가
조금씩 따스해지기 시작했었네
서편 해는 빠르게 지고
포구에 한참을 그렇게 쪼그려 앉아
노을에 잠겨 가는 생을 보았네
흘러 흘러 어느 곳에 닿을지
묻지 않고 해를 보냈네
어느새 내 등은 휘고
먼 불빛, 어선의 그물에 걸린 새우도
등이 굽고 저 멀리 초생달도
얼레빗처럼 휘었네
-시평 (2007년 여름호)-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
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
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
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어라 벙어리처럼 하�어라 눈썹도 없
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에서
헌 집 / 김윤배
헌집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낡은 마당을 어슬렁거릴 뿐
후박나무 그림자가 길어져도 문 여닫는 소리가 없다
바람이 혼자 산다
바람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발소리도 말소리도 없다
바람을 먹고 사는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은
그녀를 떠나 있던 물 긷는 소리도 오고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온다
헌집은 소리들, 미세한 소리들로 차고 기운다
후박나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그녀는 후박나무 아래서
바람을 더듬는다 바람의 여린뼈가 만져진다
그녀는 주름투성이의 입술을 문다
후박나무 잎새들이 검게 변한다
헌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그녀의 새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후박나무 그림자는 안다
시간이 조용히 다녀간 헌집 늙은 개 한 마리 봄볕에 졸고
바람꽃 찾아와도 물긷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시집<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 2007년 문학과지성사-
詩境齋 詩篇 5 / 김윤배
- 새알
집배원은 한 달 째 다녀가지 않았다
나무우편함 속에는 시경재의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
오지 않은 편지를 꺼내기 위해
우편함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나는 오- 하고 탄성을 질렀다
작고 앙증맞은 박새알 네 개가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연이 거기 그렇게
조약돌 같은 모습으로 와 앉아 있다
나무우편함이 보이지 않게 웃는다
소나무숲도 고개를 기웃거린다
지나가던 구름도 잠시 멈추어 선듯
박새알들은 수줍어 목을 움츠린다
기다림은 모두 같은 모습인가보다
연약한 손가락을 가슴에 모으고
깨지기 쉬운 껍질로 동그랗게 목숨을 감싸안고
소리 없이 돌아와 앉아 있는 저 조그만
침묵, 침묵, 침묵, 침묵들
어머니 손가락 / 이무원
지난 4월 선산에 납골당을 조성하였다
포크레인 기사는 숙련된 솜씨로 파묘를 하고
김 사장은 차근차근 유골을 수습했다
그늘에 집을 지으신 할머니는 곱게 탈골을 하셨는데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할아버지 집에서는 물이 나왔다
등성이 외진 곳에 누워 외로웠을 형수네 집은 흙이 화장품처럼 고왔다
저승에서도 한집 살림을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집은 돌집
아직도 이승에서 입고 가신 옷을 반쯤 걸치고 계셨다
어머니 손을 감싸고 있던 장갑을 벗겼다
도르르,
다섯 개의 동그란 뼈가 공기돌처럼 굴러 나왔다
어머니
불현듯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동생이 죽었을 때 목놓아 우시던 어머니가 보였다
인민군에 끌려간 형 살려달라고 정한수 떠놓고 비시던 모습이 보였다
내 등록금 마련하러 급히 사립을 나가시던 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었다
무당개구리 77마리 / 이무원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는
무당개구리가 77마리 사는데
밤이면 그놈들이 칠칠하게 울어
산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어느 순간 팔짝 뛰어 적멸보궁으로 우르르 몰려가
침묵의 시위를 하기도 하는데
스님은 별당에 앉아
78번째 무당개구리가 되게 해달라고
무겁게 무겁게 목탁을 두드리기도 하는데
그 소리 사이사이
달빛이 들어와
북도 치고
종도 울리고
운판고 다독이고
목어의 내장을 꺼내기도 하는데
소가 싸운다 / 이승하
모래사장은 시방 엄청나다
뜨거운 힘과 힘이 맞서 있다
쏘아보는 저 소의 눈이
링에 오른 격투기 선수 같다
거품을 입가에 지그시 물고
앞발로 호기롭게 모래사장을 찬다
징이 울리자
힘이 힘을 향해 달려 나간다
사방팔방으로 모래가 튀고
사람들의 함성 …… 소와 사람의 힘이 튄다
저놈이 지면 내 힘이 다 빠지고
저놈이 이기면 남의 힘까지 내 힘이 되는 세상
한쪽 소의 뿔에 더 큰 분노가 실려
다른 소의 뒷발이 밀리기 시작한다
힘으로 들이받자 힘으로 맞받는다
모래사장에 튀는 피 뿌려지는 침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싸움판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던 소가
마침내 삼십육계를 놓자
징이 울린다 싸움이 끝나자
한쪽은 더 큰 함성을 지르고
다른쪽은 욕설을 뱉는다
쫓겨 달아난 소가 못내 미운지
이긴 소 못다 한 힘을 어떻게 못해 씩씩거린다
이긴 소의 주인은 카악 가래침을 내뱉는다
푸른 지폐와 누른 수표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소의 눈빛보다
더 살벌하다 더더욱 분노에 차 있다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민들레역 / 송찬호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
에구, 이 철없는 쇳덩어리야,
오목눈이 울리는 뻐꾹새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양말 무릎까지
끌어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 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가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벗어놓은 스타킹 /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 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제22회 <소월시문학상>작품집에서-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수상작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뜨거운 발 / 함순례
어스름 할머니민박 외진 방에 든다
방파제에서 그물 깁던 오십 줄의 사내
지금쯤 어느 속정 깊은 여인네와
바짓가랑이 갯내 털어내고 있을까
저마다 제 등껍질 챙겨가고 난 뒤
어항의 물비늘만 혼자 반짝인다
이곳까지 따라붙은 그리움의 물살들
밤새 창턱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사랑이 저런 것일까 벼랑 차고 바윗살 핥아
제 살 불려가는 시린 슬픔일까
몸이 자랄 때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다를 헤매야 하는 소라게야
울지 말아라 쓸쓸해하지 말아라
게잠으로 누워 옆걸음 치며 돌아가야 할
누더기 등껍질 촘촘 기워간다
물 밀려간 자리 흰 거품 걷어내며
기어 나오는,
소라게의 발이 뜨겁다
-시집 <뜨거운 발> 2006년 '애지-
잠자리 / 함순례
매미 소리 물고 잠자리 날아든다
장맛비에 물러터진 복숭아처럼 꼭지 잃은 말들이 썩어가는 동안 3억 년 이상 아름다운 비행 멈추지 않은 널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교정지와 출판사와 제본소 오가는 사이 뜨거운 햇살과 내통한 듯 비틀거리던 기억이 난다 짧은 그늘 비껴 걸으며 눈빛 붉어지고 입안엔 단내 풍겨나왔다
여름 물가에서 차례차례 껍질 벗고 오늘 아침 창가에 투명한 그물 펼치는 잠자리떼, 내 발목에도 말랑한 피가 도는 것이다
지금 난 겹눈 훔쳐 달고 검붉은 자루 속 빠져나오는 중이다
파도 055 / 권주열
바다는 새벽부터 시동을 걸고 있다. TV를 보는 동안에도 아니, 밤에도 낮에도 오늘처럼 흐린 날에도 시동을 걸고 있다. 항구가 환히 보이는 베란다 그 유리창 너머는 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발, 불발인 구형의 바다. 크르릉 크르릉 목 쉰 기계음 사이로 간간이 바람이 석유처럼 흔들릴 뿐, 인적 드문 방파제를 붙들고 수천 수억만 년 시동을 걸고 있는 저 소리, 바다 한 척 언제 떠나려는가.
등 / 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 2007년 <시인세계> 봄호-
나는, 웃는다 / 유홍준
깜박.
눈을 붙였다
깼을 뿐인데 누가
내 머리를 파먹은 거야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누가 내 눈동자를 쪼아먹은 거야 수박덩어리처럼
누가 넝쿨에서 내 꼭지를 잘라낸 거야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 숟가락으로 파먹다 만
뒤통수를 감추고 웃는다
이렇게 파먹힌 얼굴
이렇게 파먹힌 뒤통수로
이렇게 쪼아먹힌 눈 이렇게 갈라터진 흉터로
누가 내 뒤통수에 빨간 소독약 묻힌 솜뭉치를 쑤셔넣다 놔둔 거야
누가 내 웃음에 주삿바늘을 꽂아놓은 거야 누가
내 웃음에 링거 줄을 꽂고 포도당을 투약하는 거야
누가 바퀴 달린 이 침대를 밀며 달리는 거야
복도처럼 아득하게 웃는다 미닫이처럼
드르륵 웃는다 하얀 시트가 깔린 이 수술대 위에서
배를 잡고 웃는다 이 흉터 같은 입술
이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흉터 같은 입술로 누가
흉터 위에
립스틱을 바르는 거야
누가 이 흉터끼리 뽀뽀를 시키는 거야
화장(火葬) / 유지소
당신이 세상에서
취소되고 있다
굴뚝의 검은 입으로 당신의 비밀스런 기억들이 올올이 풀려나가고 바람은 커다란 지우개를 밀고 다니며 당신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린다 지상에는 비 내리는 오후가 시작되고 당신의 시간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마지막 식탁에 올린 내 살갗 벗겨진 마음을 당신은 먹었는가
떡갈나무가 젖은 손으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린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선인장 / 유지소
태양은 선인장을 간섭하지 않는다 바람도 모래도 선인장을 간섭하지 않는다 태양은 애당초 불타는 것 밖에 몰랐고 바람은 내처 떠돌고 있었으며 모래는 오로지 부서지며 가벼워지고 있었을 뿐이다 선인장이 태양 때문에 바람 때문에 모래 때문에 변모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루한 관습이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선인장이 있었을 뿐이다 여러해살이 선인장이 여러해살이 태양과 바람과 모래와 한 하늘 한 대지에 살았을 뿐이다
선인장의 잎사귀가 가시로 변한 것은 선인장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선인장의 몸뚱이가 눈물단지로 변한 것도 선인장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선인장을 仙人掌; 선인의 손바닥, 선인의 발바닥; 이라고 부르는 것은 맨 처음 선인장을 仙人掌이라고 명명한 어떤 사람의 간섭 때문이다
-시집 <제 4번 방 > 2006년 천년의시작-
적사과 / 손순미
남자는 빨갛게 구워진 사과를 팔고 있었다 사과는 남자의 직영농장에서 알맞게 구워 온다고 하였다
남자의 농장은 거대한 아궁이 인 셈이다 그 아궁이 속에는 늘 다량의 햇빛과 투명한 공기가 불탄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 한 상자를 주문했다 남자는 사과 맛이 한 마디로 뜨겁다며 태양같이 웃었다 배달된 사과를 보고 아이들은 불덩이 같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껍질을 조심스럽게 깎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사과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나도 사과 속으로 들어갔다 덜커덩 사과의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었다
사과향은 오래도록 이글거렸다 사과의 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남자와 농장과 햇볕과 공기를 자꾸 분석하였다
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블랙홀 / 박남희
나는 어린 시절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목공 일을 도와드렸다
그 때 아버지는 넓적한 송판을 대패로 밀어
문짝이나 마루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그 때 송판은 솔향기 짙게 풍기며
간혹 가다 여기 저기
알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내 유년을 데리고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세상 밖 풍경을 구경시키다가 흘끗
마당 앞 세발자전거나 냉이꽃 옆에 세워두곤 하였다
나는 그 때 그 구멍이 단지
다람쥐 구멍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그 구멍은 차츰 내 안으로 들어와
블랙홀이 되었다
나는 그 때 너무 단단한 것은 저렇게
구멍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빠져나간 옹이는
내 생애가 수 없이 만들어 놓곤 했던
고집같이 단단한 것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 안의 블랙홀은 때때로
제 멋대로 어둠을 잡아당겨 여기저기
수많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 때마다 나는 허기져서
빈 웅덩이를 채우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늦게
지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면
내 안의 블랙홀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그 안에 갇혀있던 내 젊은 별이 아팠다
현대시 (2005년 4월호)
파란 대문 / 신지혜
그때, 철판같이 견고한 어둠 한 장이 내렸다
엄마가 내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누구든지 자기 안에 파란 대문이 있단다 네 안을 들여다보렴.
나는 내 안에 얼굴을 파묻고 날 들여다본다
가만히 바라보니, 파란 대문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흔들어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 문이 잠겨있어요 열쇠가 없어요
걱정말아라 네 마음을 그 열쇠구멍에 꽂고 힘껏 비틀어보렴.
그러나 나는 너무 녹슬었어요 엄마, 온통 붉은 꽃 투성인걸요
아니란다 이 세상에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거란다
보거라 저 공중에 네 숨결마저도 아름다운 무늬꽃을 피우고 있지
과연 바라보니, 내 숨결의 물빛 붓꽃이 투명한 공기알을 잔잔히 흔들고 있었다
나는 굳게 닫힌 파란 대문의 열쇠구멍에 나의
마음을 꽂고는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저편
시간의 태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 마음의
경계선이 모두 지워져버렸고 내 생각의 안팎이 무너져버렸다
촘촘한 두려움의 경계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파란 대문은 내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낭비 / 조말선
쟈스민이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구멍은 낭비벽이 심했다
쟈스민은 나날이 새 구멍이 생겼다
쟈스민은 나날이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쟈스민>에서 향기가 피어올랐다
향기가 나를 친친 감아 올랐다
구멍의 낭비벽은 너무 먹어치운다거나
너무 뱉어낸다는 것이다
모종컵이 낭비하는 모종들
음부들이 낭비하는 통정
구멍을 막으면 낭비벽이 사라진다!
지갑을 닫는 데는 딱 일초가 걸리고
음부를 닫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쟈스민>이 계속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현대시학 [2003년 6월호]-
어처구니 빠진/ 김원자
허물어진 집터에
버려진 맷돌 한 짝
어처구니* 빠진 구멍에
철없이 꽂혀 있는 노란 민들레
수쇠 위의 암쇠
중심에 중쇠을 박아
그 생을 돌리는 어처구니
욕망의 덩어리를 갈면서
순리의 시간을 돌리면서
한 상에서 콩국수 말아먹던
살아 있는 자들
다 데불고 어디로 갔나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서
지은 죄 하도 많아
어처구니 빠진 구멍에
고해성사를 한다.
* 어처구니 -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
팔월 연못에서 / 주용일
시절 만난 연꽃 피었다
그 연꽃 아름답다 하지 마라
더러움 딛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오욕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음부에서 피어난 꽃송이다
애초 생명의 자리는
늪이거나 뻘이거나 자궁이거나
얼마큼 질척이고 얼마쯤 더럽고
얼마쯤 냄새나고 얼마쯤 성스러운 곳이다
진흙 속의 연꽃 성스럽다 하지 마라
진흙 구멍에 처박히지 않고
진흙 구멍에 뿌리박지 않은 생 어디 있으랴
-시집 -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2003년 문학과 경계사)-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도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현대시학 2005년 6월호 신작소시집-
오늘 밤에는 진통제가 필요하다 / 주경림
차도를 넓힌다고 전봇대를 뽑는다
먼저 변압기 달린 가지를 쳤다
전깃줄도 다 거두었다
몸통만 남은 전봇대를 지게차에 묶고
엔진의 힘으로 땅 속에서 뽑아올렸다
우지끈, 사랑니 뽑던 아픔이
입 안 가득 핏물로 고였다
잇몸에 마취 주사를 놓을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쑤욱 뽑아냈다
흙 속에 담겨있던 밑둥이 젖어있다
그 구멍에 미처 햇살 한 가닥 꽂히기도 전에
콘크리트 반죽이 쏟아 부어졌다
구멍은 꼭꼭 다져지고 판판해졌다
들쑤셔 놓았다가 감쪽같이 메꾸어놓은
그 자리가 오늘 밤 편히 잠들 수 있을는지
달빛에 타이레놀 두 알을 묻어주었다
-시집 - 눈잣나무(문학아카데미)-
정로환 / 윤성학
가실 때, 정로환 한 병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멀리서 손주딸 살림을 들여다보러 온 처할머니가
선 채로 똥을 지렸다
다리를 타고 내린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멈추어섰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휴지로 그걸 훔쳐내었다
바지를 벗기고 노구를 씻겼다
딸아야,
아래를 잘 조이고 살아야 여자다
고개 돌려 모른 척하던 손주사위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인다
구멍이 헐거워
밑살이 아물지 않아
내 속이 늘 가지런하지 못했다
때론 분노를 때론 눈물을
몸에서 놓치곤 했다
늙는다는 건
구멍이 느슨해진다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늙어야
나의 구멍들을 다스릴 수 있을 건가
가실 때,
정로환 다섯 알을 내가 먼저 꺼내 먹고
가방에 넣어드렸다
강물에 대한 예의 / 나호열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숨쉬는 목각인형 / 한규동
북유럽산 자작나무 목각인형,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접합수술이 불가능한 자작나무 목각인형
부러진 자리에 대일 밴드를 붙이고
고정을 시켜 놓았다
타박타박 걷던 다리가 흔들렸다.
녀석의 또 다른 관절에서 소리가 들렸다.
몸 속에는 아직도 투명한 혈액이 흐르고 있었다
뿔에도 머리에도 가슴에도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피가 멈추는 지혈제를 바르며
붕대로 다시 감아주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녀석의
온기가 내게로 스며들어 왔다
아직 살아 숨쉬는 자작나무,
나이테가 선명하게 있는 자작나무 목각인형,
가슴이 뜨겁다
구멍 / 최서림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 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을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 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그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 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내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더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안에서 탄생하는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시집 <구멍> 2006년 세계사-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 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구멍 1 / 유용주
얼마나 많은
손들이 들락거렸던가
(결국 늙은 염쟁이까지 끌어 들이는 군)
생선 �는 냄새도 피고름도
말라버린 정액도
그 언덕에선 이제 고즈넉하고
억새인가
갈대겠지
대여섯 올 성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적막만이
폐허가 그 주인인
어머니,
제가 정말 그 구멍에서 나오긴 나왔나요
구멍에 관하여 / 이진영
세상의 모든 구멍은
어둠을 먹고 산다
낡고 오래된 구멍일수록
더 짙은 어둠을 먹고 산다
폐광이 그렇고
폐우물이 그렇고
폐움막이 그렇고
폐가가 그렇고
어머니들의 모든
폐경의 구멍이 그렇다
한때는 가장 큰 희망과 산란과
잉태와
모든 생명의 상징이었을 구멍,
그 구멍들
그 구멍의 따스함을 받아먹고 자란
우리 아버지들의 흰 입김과 오랜
발자국은 다 어디로 가고
폐경과 폐광의 구멍엔 이젠
어둠만 꽉 들어앉아 있는가
-시집 [퍽 환한 하늘]중에서-
둥글고 환한 구멍 / 이향지
달빛이 부서진다
달빛이 부서진다
삼복 날 부채 같이 훌렁거리는 개꼬리에 감겨
섣달 보름 둥근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얼음이 쩍쩍 붙는 밤
子正에 개밥 주러 나온 게으른 여자가
냄비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밥알을 긁을 때
스테인레스 숟가락 등에 부딪쳐 부서져 내린다
숟가락 목으로 탁탁 쳐서 끈끈한 밥알을 떨굴 때
숟가락 자루 쥔 손등에 걸려 부서져 내린다
일어서서 실눈을 뜨고 달을 쳐다본다
영하 58℃의 寒風에, 달은
멀고 아득한 하늘 속까지 떠밀려 갔다
달이 빠져나간 구멍은 둥글고 긴 홈통 속이다
홈통 끝은 낮인가, 홈통 저쪽만 텅 비어 환하다
잘 얼린 얼음같이 푸르스름하고 판판하고
환한 구멍, 저 둥근 구멍 밖에 달이 있는가
홈통 밖은 부서진 달빛만 자자하다
다복솔이 어깨와 머리에 앉은 눈가루를 터는 밤
한 번 더 실눈을 뜨고 홈통 속 들여다본다
달은 없다, 구멍뿐이다
주먹을 이어 붙여 주먹 망원경을 만들어 본다
조리개를 좁히고 망원경으로 당겨볼수록 달은 더 없다
섣달 보름 둥근 달이 雪寒風에 떠밀려 먼 우주로
빠져나간 구멍뿐이다, 둥글고 환한 구멍 바닥에
낯익은 나무 그림자 하나 흐리게 누워 있다
그래도 달은 둥글고 환한 구멍 하나는 남기고 간다
-<문학사상> 2000년 6월호-
담에 뚫린 구멍을 보면 / 정현종
담에 뚫린 구멍을 보면 內心
여간 신나는 게 아니다
다람쥐나 대개 아이들 짓인
그리로 나는 아주 에로틱한
눈길을 보내며 혼자
웃는다 득의양양
담이나 철책 같은 데 뚫린
구멍은 참 別味가 아닐 수 없다
다람쥐가 뚫은 구멍이든
아이들이 뚫은 구멍이든
그 구멍으로는 참으로 구원과도 같은
法悅이 드나들고 神法조차도 도무지
마땅찮은 공기가 드나든다!
오호라
나는 모든 담에 구멍을 뚫으리라
다람쥐와 더불어
아이들과 더불어
자벌레구멍 / 위선환
쳐다보니
떡갈나무 잎사귀에
자벌레가 붙어 있습니다
그저 그러는구나 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니
자벌레는 없고
가늘게, 길다랗게, 그리고 파랗게,
딱 자벌레만한 구멍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뚫려 있습니다
자벌레가 하늘 되는 방법이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면서
자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을
찬찬히 봐두라고,
비좁지만 이미 자벌레가 그랬듯이
조심해서 몸을 끼워 넣고는 재빠르게
뒤로 빠져 나가버리라고, 그것이
방법이라고
-시집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구멍 / 최영애
입속의 별 하나 빠졌다
아이의 몸에 구멍이 파였다
네 몸엔 별의 뿌리가 있어
그 자리는 곧 메워질 거야
몇 번의 구멍이 생긴 뒤에
비로소 어른이 되는거야
어머니는 명주실로 흔들리는 이를 뽑아
지붕 저쪽으로 던지셨다
'까치야 까치야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새로운 별이 구멍에 박힐 거라고
우는 나를 달래셨다
입 속에 생긴 허공으로 하늘이 아득했다
아이 이 하나 손에 쥐고 아파트 꼭대기를 쳐다본다
하늘이 정수리에 닿을 듯 가깝다
어머니, 지우신다 / 이경림
휑한 방에 누워 자꾸 지우신다 장롱만한
지우개로 삯뜨개질의 날들을 지우신다
지워도 자꾸 풀려나오는 실꾸리, 실같이 가는
기억의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실꾸리가
구멍 저편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 팔을 넣고 휘젓는 어머니, 한 실마리가
잡. 혔. 다. 친친 감긴 한시절이 끌려나온다
치마꼬리에 매달린 죽은 아들, 찐 고구마,
없는 치료비......, 욕설의 날들이,
찬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 위로
오색 날개의 퉁퉁한 치욕들이 윙윙 난다
저리 가!
쫓아도 자꾸 붙는다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에 당선작-
쌈 / 노연화
김장을 하다가 문득
엄니 생각이 났다.
고갱이 노란 배추 속살을 씹으며
내가 먹고 자란 엄니의 몸이
그 찰졌던 밥의 육체가 생각났다.
가을볕에 등이 젖어 따스해질 무렵
아버지가 입다 내놓은
구멍 숭숭 뚫린 삭은 런닝구 입고
니 아부지 뼈 빠지게 벌은 돈으로 산 건데
난 집에만 있으니 어떠냐 하시던
격식을 갖추어야 할 사람과는
쌈을 같이 먹지 마라.
나는 우중충해도 니는 하얘야 한다
내 몸이 으스러져도 니는 고와야한다던
엄니, 배추 속고갱이 같은 말씀들.
지금 나는 아무데서고 쌈을 잘 먹는다.
입 터지도록 밀어 넣고 아구아구 먹는다.
구멍 난 런닝구 입던 엄니가 되어간다.
내 아이들의 밥이 되어간다.
쌈이 되어간다.
-詩와창작 (2005년 봄호)
소리의 그늘 속으로 / 이화은
중이
죽은 대추나무 방망이 두들기는 소리와
딱따구리가
오동나무 쪼아내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지난 봄 한철이 쩡쩡했다는데
중이 목탁 치는 일이나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 파는 일이나
다 제 본업일 터
그러고 보면
중이나 딱따구리나
생업에 충실했던 노동의 한마당이었겠다
절집의 곳간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울엄니처럼
가슴 한복판에 뻥! 구멍을 안고도
주렁주렁
오동나무의 자식농사는
올해도 대풍이니
큰소리 지나간 자리에 깃들 큰 고요는
또 얼마나 깊을까
슬그머니 가을귀를 미리 당겨
소리의 그늘 속으로 미리 한발을
밀어넣네
아름다운 매춘에 대하여 / 박남희
벌레의 꿈틀거림에 관한 기억을 난 알고 있어 내 몸을 갉아 먹고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하늘을 보는 벌레, 그래 나는 분명히 벌레먹은 이파리였어 그런데 너는 누구니? 벌레 먹은 나를 쳐다보다가 내 존재의 밑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 나에게 살아있느냐고, 살아있느냐고 수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너는,
그날 이후 햇빛은 나에게 선물을 주었어 벌레의 이빨에 갉아먹힌 만큼의 상처와 누군가에게 흔들린 만큼의 시련을 얹어 내 살갗 속에, 녹색의 길 속에 다독이며 별빛의 하늘에 이르는 눈빛을 선사해 주었어
그래 이제 벌레에 대해서 말해주지, 벌레의 끊임없는 꿈틀거림에 관해서, 그 순수한 생의 몸부림에 관해서, 벌레와 함께 해온
내 아름다운 매춘에 대해서, 이미 벌레에게 바친 이 한 몸 나를 갉아먹어도 나는 그가 좋아 난 지금도 밤마다 내사랑 벌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에 대해, 한 순간 반짝이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멸에 대해, 벌레먹은 채로도 아름다운 내 몸에 대해,
그런데 지금도 자꾸만 내 몸을 흔들어대는 너는 누구니?
능소화 /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 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宵)야, 능소(凌宵)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 이야 아니되어도 능소(凌宵)야, 능소(凌宵)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꽃병 / 마경덕
온몸이 입이다
한 입에 우겨넣은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안 그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 없이 생피를 들이키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시한부 목숨들. 나, 나 얼마나 살 수 있지? 물컹물컹 썩어 가는 발목을 담그고 일제히 폭소를 터트린다.
아름답다 저 구멍.
느티나무 할아범 / 박동진
동네 고샅, 늙은 느티나무 베어지던 날
이장 선거에 떨어진 영감 골이 났다
"늙어 힘없으면 발 품 파는 심부름도 못한다디야,
이런 우라질 세상"
서른 아홉에 상처한 영감
죽은 갓난아이, 기차에 뛰어 든 젊은 놈
돌림병에 죽은 벙어리, 저승길 편히 가도록
동네 궂은 일 마다 않던 영감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죽기 전에 이장 한번 하겠다는데
귀농한 젊은이가 이장이 되었다
젊은 이장, 교통에 방해된다며
고샅길 수백 년 먹은 느티나무를
단숨에 전기톱으로 베어냈다.
몸통에 구멍 뚫린 느티나무 할아범
수백 년 묵은 뿌리가 잘려나갔다
낮술에 벌개진 영감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서너 병 안주 없이 마시고
"나무 그늘에 땀 식히지 않은 놈 있었느냐" 호령이시다
오일장 보고 돌아올 때 다리쉼 할
느티나무 그늘이 걱정이다
뻘밭 / 함민복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멍에서 태어난 물들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들 지은 놈 하나 없네
-시집 - 말랑말랑한 힘 (2005년 문학세계사)
피리 / 김경주
모를 심어가듯 구멍마다 숨을 심는다 갈라진 논길을 더듬는 단비같은 입술로 대궁 속, 소리의 가뭄을 교란시킨다 헛김만 가득한 어둠 속에 한 모 한 모 맑은 숨의 뿌리만을 묶어 심고 안창 깊은 곳, 오래 다진 울음들을 퇴비로 깔아준다 소리의 피를 빨던 거머리들이 녹아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속내 오므리고 쓰러졌던 모종, 소리의 탯줄들이 풀리는 것이다 더운 바람만 요란했던 내부, 소리의 자궁 어디쯤에서 생쌀만한 슬픔들은 익어 가는 것일까 퍽퍽 뜨거운 눈물을 뱉어내며 태어나는 알몸의 벼들, 바람의 입술을 스치고 고랑 밖으로 쏟아질 때까지 쏟아질 때까지
빵구집 / 김영탁
빵구집이 있네
무엇이든지 구멍 나면 때워주는 그 집
홀아비 박씨 단 하나 못 때우는 게 있다면,
그 흔한 처녀는 그만두고
벙어리 과부 하나 못 때우는
그 빵구집
-시집 - 새소리에 몸이 절로 먼산보고 인사하네 (2005년 황금알)
못을 박으며 / 박남희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쎈타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벨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벨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멍 속으로 퍼져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곰장어 굽는 저녁 / 안도현
수족관 속 곰장어는 슬퍼서 몸이 길구나
물속을 얼마나 후려치며 싸돌아다녔기에
이렇게 길쭉해졌다는 말이냐
일생(一生)이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 몇뼘 늘리는 일이었구나
그러나 생(生)을 벗기는 일 또한
가만히 보니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살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듯
껍질은 단숨에 벗겨진다
평생 몸에 두르고 살던 껍질은 거추장스러웠으나
껍질 벗긴 다음에 드러난 알몸은 외려
부끄러운 것, 그리하여 퍼덕퍼덕 몸을 떨다가
곰장어는 자신을 선선히 도마 위에 눕혔을 것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몸에 바르고 지금
곰장어는 숯불 위에 올린 석쇠에 누워 있다
더는 꼬리로 바다를 후려칠 필요가 없고
다시는 뜨거운 불 위를 헤엄쳐 갈 일 없는 몸이
발긋발긋 익어가고 있다
하늘로 기어오르려나
포장마차 밖에는 눈보라의 긴 꼬리가
세상 속에다 구멍을 내는 저녁
-시집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 장옥관
옛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성대도 늙는가, 굵고 탁한 목소리. 10년 전 이사 올 때 뭉쳐 놓았던 고무 호스, 벌어진 채 구멍 오므라들지 않던 호스가 떠올랐다.
오후에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 흰 모시 치마저고리만 고집하던 노마님이 사돈집에 갔다가 아래쪽이 조여지지 않아 마루에 선 채 그만 실례를 하셨다고-.
휴지 가지러 간 사이 식어버린 몸, 애걸복걸 제 몸에 사정하는 딱한 사연도 있다.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 없는 不隨意筋, 늙음이다. 몸 조여지지 않는데도 마음 사그라들지 않는 난감함,
늙음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실은 남남이듯 몸과 마음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깨달음, 찬물에 발바닥 적시듯 제 스스로 느끼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 이것이 늙음이다.
-작가세계 ( 2005년 여름)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 정연홍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2005년 <시와시학>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파리 / 이성복
초가을 한낮에 소파 위에서 파리 두 마리 교미한다 처음엔 쌕쌕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급기야 올라타서는 할딱거리며 몸 구르는 파리들의
대낮 정사, 이따금 하느작거리는 날개는 얕은 신음소리를 대신하고 털
보숭이 다리의 꼼지락거림은 쾌락의 가는 경련 같은 것일 테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표정 없는 정사, 언제라도 손뼉쳐 쫓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 작은 뿌리에서 좁은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긴 생명의 운하 앞에
아득히 눈이 부시고 만다 <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편의 시>
선데이 서울 / 황규관
어둠의 색깔은 총천연색이다
나는 너무 빨리 까졌다.
여섯 살 때 좀도둑질을 해봤고
전주 남부시장통 지하 다방 레지 누나의 종아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때 미취학 아동이었다.
바른생활 책이나 월말고사 우등상보다
현란한 싸구려 화보가 나를 성장시켰음을 고백한다.
부르는 소리도 없었는데
나는 왜 접근금지인 세상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깊은 구멍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
왜 내 生을 상기시켰을까.
선데이 서울,
내 生에 총천연색 욕망을 칠해놓고
그것이 어둠임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내 經이었던
하모니카 / 배우식
3호선 전철 안에서
하모니카 부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시각 장애인인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하모니카는
세상을 보는
눈
눈이다
할아버지는
하모니카를 심장처럼 들고 다닌다
할아버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심장을 분다
빈 구멍에 고여 있는 웃음 가득한
심장을 불면 빈 눈에는
맑은 웃음꽃
맑은 웃음꽃이 가득 핀다
맑은 웃음꽃으로 세상을 보는 하모니카 할아버지는
천상 천사다
누수 / 문숙
사월의 한낮
인터폰이 울리고
아랫집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
뭐 하시는 거예요, 아래층이 다 젖어요,
새는 곳을 찾아 빨리 막으세요,
뭐라구요...... 샌다구......
구멍 난 곳을 찾기 위해
누수탐지기가 동원되고
집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축축한 거실바닥을 파헤치며
이렇게 새도록 몰랐냐며
내 안을 들여다보는 수리공
아뿔싸,
또 다른 나를 찾겠다고
내부수리를 하면서
낡은 배관을 건드렸구나
봄꽃에 마음 주고 있는 사이
조금씩 내가 새고 있었구나
내 주위가 흠뻑 젖었구나
-시집 <단추> 2006년 천년의시작
개미 / 유춘희
개미에게는 개미의 생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생이 있다
반나절 개미의 생을
게으르게 내려다 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흘금 흘금 드나드는 개미의 하루를
느린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개미의 종교가 궁금하다
개미의 학교 개미의 슈퍼마켓
개미의 부업
개미의 비애가 궁금하다
개미처럼 걸어서 식당에 가고 싶은 날
개미처럼 작은 구멍에 집을 짓고 싶은 날
개미같이 작아진 생각으로 웅크리면
정말 개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날
그날엔 / 이병률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 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 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썰물에게 / 조명
그대는 내게서 멀어질수록 푸르렀다
물결무늬 문신을 새겨놓고
물비늘 뒤집으며 떠나가는 코발트블루의 바다여
나는 주저앉은 뻘밭,
잠들지 못하는 바람,
내 안의 死海는 자꾸 달아올라 균열이 가고
잿빛 구멍들 숭숭 뚫린다
왜 火星에는 재 덮인 분화구가 그리도 많았는지
저 갈매기들은 왜 서늘한 균형으로 허공에 떠 있는지
그대는 끝내 모르리
한 큰 슬픔의 개흙구릉 속에서
사랑의 기억들은 쐐기풀처럼 살아남는 법
심장을 찌르는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기쁨으로
땅거미 내리는 텅 빈 저녁을 견딘다
홀로 구멍에서 나와 구멍으로 들어가는
갯지렁이의 등줄기를 덮는 저 어둠
폐선 한 척 기우뚱,
넘어가는 어느 노을녘,
비릿한 물머리 들이밀며 들어설 나의 코발트블루 바다여
닻도 없이 마음은
언제나 설레이는 저쪽 바다에 있다
참숯 / 정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만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들찔레와 향기 / 오규원
사내애와 계집애가 둘이 마주보고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다
오줌 줄기가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서로 오줌 나오는 구멍을 보며
눈을 껌벅거린다 그래도 바람은 사내애와
기집애 사이 강물소리를 내려놓고 간다
하늘 한 켠에는 낮달이 버려져 있고
땅을 헤집고 있는 강변
플라스틱 트럭으로 흙을 나르며 놀던
커다란 사춘기* / 서안나
오전 내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냉장고처럼 잘 우는 그녀를 열었다. 박쥐들이 날아올랐다. 그녀 안에서 한 사내가 조금씩 부패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부패하기 위해 존재하죠. 얼굴이 조금 짓무른 그녀가 루즈를 바르며 중얼거렸다. 냉장고는 사랑을 지연시켜요. 냉장고는 거짓이에요.
남자는 지퍼를 내리고 있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가 손을 뻗어 사내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 유서 같은 액체가 사내에게서 무책임하게 흘러나왔다. 사내가 아끼던 노래와 비밀스런 서약이 천천히 지상으로 흘러나왔다. 그녀가 느리게 화장을 하는 동안 지상의 열매들이 부패하고 서투른 사랑이 익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깔깔거렸다. 누군가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녀를 열었다. 새로운 거짓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마지막 눈 화장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일종의 혁명이라 구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부패들은 지연되죠. 모두 다 냉장고가 되는 거죠.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익기 시작했어요. 어깨까지 짓무른 그녀가 푸른 입술로 거짓말을 시작했다. 비가 내렸고 그녀는 부패하는 진실이 되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박민규 소설<카스테라>2005.10. (문학동네 출간)를 패러디 함.
회전문 / 이수익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 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대형 빌딩은 수직의 화강암 비석처럼 깜깜하게
하늘에 떠 있다
낮에 삼켰던 사람들의 머리에서 쏟아져나온 생각과
말들, 일거수일투족의 그림자, 그들의 홍채와 지문까지
다시 기억을 재생하고 판독하고 복사하고 지우면서
대형 빌딩은 눈을 감고도 잠들지 않는다
회전문은 묶여 있어도, 그렇다고 쉬는 것도 아니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 2007년 천년의시작
여자 / 김기택
빨간 지붕, 하얀 벽돌, 작은 반달창,
동화 속의 집 같은 예쁜 복권 판매점에
오늘도 그 여자는 앉아 있다.
시커먼 손, 누런 손, 하얀 손, 주름지고 딱딱한 손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너덜너덜한 돈을 들고 와서
빳빳하고 깨끗하고 오색찬란한 복으로 바꾸어 간다.
복권으로 복을 받을 확률은? 십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오, 얼마나 단단하고 두껍고 높은 희망인가.
이제 저 희망을 손에 쥐었으니
저들은 칼잠, 새우잠, 선잠, 불안하고 얕은 잠 속에서
필사적으로 돼지꿈을 꾸어야 하리라.
복권 파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낡은 천 원짜리가 들어온다.
점쟁이처럼 그녀는 모든 걸 한눈에 보아버린다.
얼마나 불쌍한 손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는가를
그 돈이 얼마나 떠돌며 구겨지다 왔는가를
그 손이 받아갈 복이 얼마나 힘없이 찢겨질 것인가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그녀는 헌 돈을 새 복권으로 바꾸어 준다.
지루하게 줄 서 있는 저 출구 없는 삶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있는 저 삶들에 대한
그녀의 확고하고도 유일한 처방은
언제나 단 하나―복권이었다.
얼마나 많은 오갈 데 없는 돈들을 복으로 바꾸어 주었던가.
오늘도 얼마나 많은 복을 나누어 주었던가.
그래도 아직 복권은 많다.
주택 복권, 월드컵 복권, 더블 복권, 또또 복권……
2억, 4억, 7억, 10억……
당첨금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복을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녀는 요염하게 하품을 한다,
복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귀찮다는 듯
마법의 성처럼 예쁜 집에서
복을 관리하는 여신 노릇도 이제는 시시하다는 듯.
복권 가게 앞에서 / 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 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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