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 고경숙
내 생일에 즈음해 어머니
털실 가게 다녀왔다
내 머리통을 신문지에 본뜨고
날마다 조금씩 키우기 위해
어머니 실타래를 당길 때마다
함지박 안에서 나는 탯줄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돋보기 편안하게 조는 밤
반만 완성된 모자 속으로 자꾸 기억을 들이밀면
라면발처럼 엉킨 어머니의 헌 실은
오빠의 스웨터에서 언니의 조끼로
잘도 둔갑했다
선술집 색시 간드러지는 노랫소리
깊은 밤 삼켜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삶을 짜다 풀었는지
아랫목에 앉아 끝없이 털실을 감는
어머니 온 몸이 구불구불하다
오늘도 그 밤처럼 외풍 심한데
어멈 생일이 며칠 남았누?
어른거리는 손가락에 자꾸 헛 바늘을 꽂으며
오빠 것도 언니 것도 아닌 온전한 내 모자를 낳느라
함지박 속에서 어머니와 내가
데굴데굴 구른다
덕진 연꽃 / 나호열
연꽃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
누군가를 처음 그리워 할 때처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불꽃 속에 숨어 있음을
그대의 눈빛을 보고 알았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도 어쩌면 저리
소중한 그 무엇을 감싸안은 두 손 모양 경건하냐고
두 손 모두어 거두어들인 그 무엇이 또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비 한 방울이 또르르
연꽃 속으로 들어가서는
아직도 아직도 길이 멀어서인지
날 저물도록 기별이 없네
거미줄 /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고구마 / 김일용
30도를 오르내리는 가마솥 더위
논고랑 밭고랑도 늘어지는 한낮
몸을 던져 넣고 일을 하다 보면
마른 장작처럼 내 몸에 불이 붙는다
몸도 뜨거우면 가마솥처럼 더운 눈물을 흘리는가
비죽비죽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쳐내며
나는 논밭에서 고구마로 삶아지고 있었다
푹 뜸을 들이듯 진득이 참아내는 시간
나태와 게으름이 김으로 빠져나가고
갓 삶아낸 발그레한 고구마 한 덩이를
선풍기 앞에 눕히고는,
예의 그 수놈의 코드를 처음인 듯 콘센트에 꽂는다
워밍업 할 여유도 없이 강풍에 달려들어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며 핥아준다
그제야 홧홧한 열기가 식어내리고
고들고들 먹기 좋게 된 고구마 한 덩이
땅에 가깝다는 것 / 고완수
생이 막장 같은 아버지가
땅에 가깝다는 것은
외발 손수레를 밀 때다
환갑을 넘긴 노구에도
외발 손수레 실력은
나보다 한결 윗길이다
지금껏 책장만 넘겨온
나야 빈 수레로 밀어 봐도
쉬 중심이 무너지는데
무를 고봉밥처럼 싣고도
파도치는 밭고랑 춤추듯
걸어가는 저 여유라니
수레 밖으로 늘어진
청청한 무청도 편안한지
덩달아 우쭐댄다
땅에 가깝다는 것, 그건
아버지가 외발 손수레
밀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집 <나는 자주 망설인다> 2007년 문학의전당-
산벚꽃 피는 날이면 / 고완수
살아생전 어린 나를 귀애貴愛 하던 할머니는 봄바람 일자 서둘러 분홍치마 곱게 갈아입고 산으로 들어가셨다 오래도록 집을 울리던 해수 비로소 멎었다
할머니가 그립던 할아버지 자주 산을 올려보다 아지랑이 오르자 슬몃 분홍 이불 한 채 지고 그 산에 오르셨다 할머니의 쓸쓸한 추위가 내내 안쓰러웠는가
그 후로 산이 내 마음에서 사라지는 날이 잦을수록, 산벚꽃 피는 날이면 그 산 내 맘에 홀로 높아 분홍빛을 견디는 데도 자주 신열에 시달렸다
-시집 <나는 자주 망설인다> 2007년 문학의전당
2020년, 인조인간 메두사 / 오늘
미용사 아가씨
내 머리칼 좀 잘라주세요
너무 많은 메모리들로 과부하에 걸렸어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스파크가 일어나고
미래를 저장시킬 공간이 다 타버렸어요
내장된 칩들 속에서 수많은 실뱀이 꿈틀거려요
치명적인 오류들은 갈라진 혓바닥으로 뻗어 나와
튀어나온 눈동자를 핥고 있어요
하루 종일 귀에서 비릿한 노래 소리 웅얼거리더니
이제, 입은 하나의 생각만 질겅질겅 씹어요
천 개의 말들이 미끄러져 목구멍을 틀어막아요
숨 막혀요 유행 따윈 상관없으니 내 머리칼 좀 잘라주세요
오오, 사방의 거울이 꿈틀거려요
당신의 비닐 앞치마가 너무 미끄럽다고
잘린 머리칼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요
나는 검은 물이 다 빠지도록 창밖을 씹고 있을래요
기억도 적당히
망각도 적당히
사랑 따위는 쉽게 삭제될 수 있는
그런, 칩 하나만 남겨두시면 돼요
메피스토* 와의 통화 / 오늘
신장 삽니다
3000만원에서 5000만원 까지 보장!
H.P : 018-249-8010
사내는 핸드폰 폴더를 열어
스티커 속 현금지급기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난 싱싱한 장기만을 취급하죠
만나서 값을 가늠해볼까요
2년 전에 담배를 끊으셨다니 더 받을 수 있겠네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한쪽 신장으로도 충분히
남은 삶을 걸러낼 수 있답니다
대신, 건강한 지폐를 드릴게요
다시 날고 싶지 않으세요?
몸속 가득한 지폐를 꺼내서
목구멍에 가릉거리는 욕설들을 뱉어 봐요
신문지조차 덮어 줄 수 없던 허기
조금의 수고비만 내게 주고
즐거워질 육체를 상상 해봐요
십분 후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하죠
아, 안구와 골수는 더 비싼 값을 쳐 드릴 수 있으니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 보시기를
사내의 가벼워진 영혼이
핸드폰 폴더와 함께 접히고 있다.
메피스토* : 인간의 영혼을 사는 악마
소리 없이, 세고비아는 / 김정희
기타는
오랫동안 울림통에 고여 있던 묵은 가락이 버거웠던 것일까
어느 날 스스로 모가지를 버렸다
스물 몇 해의 시간을 단번에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기타는
해자(該字) 같은 적막을 뒤집어쓴 채
벽에 등을 대고만 있다
나는 밤마다
소리유적(遺蹟) 앞에 앉는다
도굴꾼 마냥 귀를 걸어놓고
어둠 속에서 무늬로 남은 가락들을 더듬어간다
어디선가
잠든 세상을 열고 나온 손가락들이
기타 줄을 퉁긴다
동면을 마친 배암처럼 고개쳐드는 노랫소리들
서서히 靜과 動의 경계를 지우며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흐르다가 주절대다가 애무하다가 술병처럼
쓰러지다가 나를 휘감다가
눈을 떴다
더 이상 몽상을 할 수 없는 기타는
여전히 부러진 모가지를 달고 잠들어 있다
어제도 내일도 캄캄하게
나는
마음 수첩을 펼쳐
그간의 내력들을 적어내려 간다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2007년 문학의전당
생애生涯 / 전길자
길게 이어진
몇 겹의 고통이
덕장에 걸려 있다
내장 다 빼버리고
얼었다 녹아내리기를 반복하지 않고서는
제 값을 받을 수 없다
살얼음 품어야만 제 맛을 내는
빳빳하게 긴장한 삶이어야 깊은 맛 우려내는 생애
한 번쯤 덕장을 빠져나가
겨울바람 피하고 싶었을까
한 번쯤 사랑에 녹아
허물어지고 싶었을까
하얗게 쏟아지는 눈발 끌어안고
곧추서서 기다리는
먼 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렇듯.
-'현대시' 2006년 1월호
나무는 아파도 서서 앓는다 / 전길자
과천에서 안양으로 가는 길목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정부청사가 옮겨온 후부터
땅들이 날개를 달았다
온통 거리는 금그어지고
땅 밑까지 몸살을 앓는다
죄 없는 뿌리까지 상처입고도
하소연도 못한 채
링겔병을 꽂고 서서 앓고 있다
나무는 아파도 서서 앓는다.
0순위 / 전길자
집장만 한다고 합가하여 살고 있는 딸아이는
내 집인지 저희 집인지
이제 네 살짜리 아들 위해
몇 박스의 책을 사들이고는
듣던지 안 듣던지
무릎에 앉히고 하루에 열 권씩은 읽어준다
저 미련한 짓 쯧쯧
집 장만하려면 한 푼이라도 저축을 해야지
이제 네살짜리에게 쯧쯧
그러나 호수공원 산책하러 나갔다가 뒤통수 맞았다
건강하게 살자고 호수공원 걸으러
네 살짜리 데리고 나간 날
바람이 너무 세게 분다
아가야 손수건 입에 대거라 했더니
"봄이 오려고 그러나 봐요,"
네 살짜리가 ……
집이 좁거나 말았거나
미친듯이 읽어주던 책은
집값보다 우선 순위다
옷걸이 / 이경림
불 꺼진 방 귀퉁이
장롱과 벽 사이에 그가 서 있다
비썩 마른 몸에
불쑥불쑥 못대가리를 내민 그가
후줄근한 껍데기를 자신에게 벗어 걸고
세상 모르고 잠든 식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틈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누운
자신을 보고 있다
캄캄함으로 꽉찬 하루를 보고있다
감포 가는 길 / 나호열
누구나 한 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게 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리저리 굽이치는
길의 끝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길의 끝에는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치면 기쁨으로
슬픔으로 다가서면 슬픔으로 울리는 바다가 있음을
꿈꾸듯 살아왔음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때아닌 나비 떼
눈 한 번 크게 뜨니 성성한 눈발이더니
다시 한 번 눈감았다 보니 너울대는 재들
바다 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을 따라
아름답게 사라져 버리는 추억을
데리고 가는 길
갯지렁이/ 김혜경
뻘 속을 기는
힘으로 일생을 살아 간다
이방인의 무심한 호미질에 허리가 끊어져도
제 집으로 돌아가 다시 마디를 키운다
질척한 뻘은
갯지렁이에게 유일한
무상임대아파트
배 한 척 없이 살아도
맨몸으로 버티는 칠천도*
-문디 자슥들, 객지 가모 별수 있나
뭍으로 가고 싶은 욕망 누른
아버지 주름의 이력서가
물 빠진 뻘 가득 거친 파도를 쥐고 있다
-『시와창작』2007년. 5,6월호
* 칠천도 : 거제도 안에 있는 작은 섬
옛 편지를 읽는 저녁 / 황영선
비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 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열고 문 열어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동인지 <행단> 2007년 제 2호
홍어 / 황영선
그녀의 태생은 바다였다
곰삭은 후에야 제 맛을 보여준다는
홍어,
그녀는 서너 개의 칼을 허리춤에 꽂고 다닌다
도마 가득한 칼금이 훈장처럼 박힌
그녀의 인생 이력서
시장통에 들어서면 그녀의 칼통은 빛난다
까막눈에 재주는 칼질 뿐이어서
칼통이 밥통이 되어버렸다고
날렵한 솜씨로 칼을 벼린다
생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서는
홍어맛을 알아야 한다고
오늘도 칼통을 옆구리에 차고
철커덕철커덕 시장통을 누비는
그녀의 삶에도 홍어냄새가 난다
먼 바다를 향해하는
그녀의 유유한 칼질 소리에
일찌감치 시장통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의 생이 황금어장처럼 빛난다
눈물 콧물 범벅되어 물고 있던 홍어 한 점처럼
생의 한고비를 넘던 어미의 몸에서 나던 그 냄새가
홍어냄새였다니
-동인지 <행단> 2007년 제 2호
보라, 감자꽃 / 박성우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일 갈 적에도
마을회관 놀러 갈 적에도
문 안 잠그고 다니는 니 어미
누가, 자식 놈 흉이라도 볼까봐
끼니 때 돌아오면
대문 꼭꼭 걸어 잠그고
찬밥에 물 말아 훌훌 넘기는
칠순에 닿은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어머니가 챙겨 싸준 감자
쪼글쪼글 썩혀서 버린 화단에
자주 감자꽃은 피어,
꽃핀 나 볼라 말고
쪼글쪼글 오그라드는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시집 <가뜬한 잠> 2007년 창비
보리밭 / 최정란
초록침대가 흔들린다
기름진 푸른 거웃 일렁인다
한바탕 바람이 뒹굴고 간다
황사 자옥한 하늘
진달래 꽃무덤 덮으며
건조주의보가 내린다
산이 구름브래지어를 벗는다
목마른 하늘 앞에
물 오른 젖가슴을 들이민다
푸른 수유의 풍경
사월이 서둘러 흐트러진
초록시트를 정돈한다
넥타이 / 최정란
고치 속의 누에처럼 웅크리고 잠든 그 남자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생의 중심에 묶인 넥타이 푼 적 없다
벼랑 끝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팽팽하게
목을 조이는 목줄 끝
날개와 맞바꾼 계약의 화살표는 아래로 향한다
참을 수 없이 팽창된 날카로운 한 순간이
뜨거운 절망을 쏘아내고 곤두박질 치면
순한 짐승처럼 늘어지던 넥타이
날아오르려는 순간 번번이
추의 무게에 발목 잡혀
절벽 아래로 수직 강하한다
그는 가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자랑스런 기호 풀고 싶었던 적 없었을까
올가미처럼 조여드는 넥타이 대신
비린 달빛에 입덧하는 늪으로 누워서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가시연꽃 같은 것
생의 외곽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싶지 않았을까
중심을 가장 가파른 벼랑에 묶어 둔 블랙유머
누구의 매듭을 풀고 나온 넥타이일까
물뱀 한 마리, 수면 위를 미끄러진다
-시집 <여우장갑> 2007년 문학의전당
물의 베개 /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담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은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시집 <가뜬한 잠> 2007년 창비
매생이 / 정일근
다시 장가든다면 목포와 해남 사이쯤
매생이국 끓일 줄 아는 어머니를 둔
매생이처럼 달고 향기로운 여자와 살고 싶다.
뻘바다에서 매생이 따는 한겨울이 오면
장모의 백년손님으로 당당하게 찾아가
아침저녁 밥상에 오르는 매생이국을 먹으며
눈 나리는 겨울밤 뜨끈뜨끈하게 보내고 싶다.
파래 위에 김 잡히고 김 위에 매생이 잡히니
매생이를 먹고 자란 나의 아내는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여자일거니, 우리는
명주실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것이다.
남쪽에서 매생이국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차가운 표정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진실과
그 진실 훌훌 소리내어 마시다 보면
영혼과 육체가 함께 뜨거워지는 것을.
아, 나의 아내도 그러할 것이다
뜨거워지면 엉켜 떨어지지 않는 매생이처럼
우리는 한몸이 되어 사랑할 것이다.
* 매생이는 남도의 청정해역에서 겨울에만 채취되는 무공해 해조류로, 생김새는 아주 가느다란 실들이 뭉쳐 있는 느낌으로 파래보다도 입자가 가늘다.
매생이국은 아무리 펄펄 끓여도 김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남도 지방에서는 “미운 사위에 매생이국 준다”는 식담도 있다.
탄수화물, 단백질, 회분, 수분이 많은 반면 지방 함량이 낮고 칼슘이 풍부해 여성 골다공증 예방 등에 좋다고 알려져있다.
-허영만의 <식객> 중에서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시집 - 삼천갑자 복사빛(2005년 민음사)
상일동 아침 / 천양희
아침마다 뻐꾸기가
복국(復國), 복국 울고
아침마다
상일(上一) 세탁소 아저씨가
세탁(世濁), 세탁 외친다
세상 탁해, 세상 탁해
탁한 세상
세탁하라는 소리 같아
그 소리
높이 들어올린 아침
탁한 몸 한 벌
세탁하고 싶네
수녀원의 꽃 / 정재록
까리따스 수녀원의 화단에서 시들시들 작약이 지고 있다 연분홍 꽃잎들이 한 겹 한 겹 꽃을 벗기고 있다 탐스럽던 꽃송이들이 활옷 아래 스란치마, 삼회장저고리에 속적삼, 속곳, 속속곳까지 꼭꼭 껴입은 대례복을 한 잎 한잎 벗어던지면서 빈 몸으로 돌아가고 있다
수태 한 번 못해보고 시들시들 지는 꽃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성모상 앞에서 성호를 긋는 아기 수녀님 통통한 볼에 분홍 작약꽃잎이 찍혔다 빈 몸으로 돌아갈지라도 수녀님은 지금 볼에 한창 꽃이 필 나이
수녀원의 화단에 지고 있는 작약꽃잎들이 흙으로 스며들고 있다 흙이 다시 꽃을 수태하는 중이다.
러닝머신 앞에서 / 나호열
그런 때가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어디론가 급히 떠나야할 듯한 자세로
벅차오르는 가쁜 숨을 두 손으로 모두었던 그 때가
거울 속으로 거울 속으로 바보같이 뛰어들어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그 때가
보일 듯 말 듯 굽은 불혹의 언덕을 넘어
마음 밖 초여름 밤나무처럼 진득한 냄새를 풍기며
아직도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비의 그림 / 김옥남
비가 아침부터
길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점점이 퍼져가는 빗방울들
너의 얼굴은 동그랬지 눈과 코
두툼한 입술선의 음영
굵은 목선은 그리움 때문에 자꾸 덧칠이 되고
여름내 밤마다 잠들지 못한 아픔의 편린들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상처로 번져간다
네가 부르는 누군가의 이름이
네 영혼의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면
싸이렌의 노래처럼 치명적 유혹일지도 모르는 것
삶은 그런 것이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비가 그리는 그림은 선을 감추고 형상들을 뭉개고
갈비뼈 사이에 감춘
깊은 열정만을 암울하게 투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걸어 간 발자국
비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기 위하여
지상에 새겨진 모든 발자국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우는 중이다
목화솜 이불 / 김옥남
십 수년 묵은
목화솜 이불을 뜯었습니다
시간의 태엽을 되돌려 풀면
당신이 나를 위해 기운 사랑이
한 땀 두 땀 야물게도 묶여 있습니다
한 때 목화로 개화했을
꽃송이 송이들
힘 주어서 꾸욱 눌러 밟으니
오랜 먼지들이 소스라쳐 오물을 토합니다
욕조속에서 물을 뺀 솜뭉치는
당신이 살아 생전 차지했던 부피만큼
동그마하게 웅크려
작디작습니다
작은 육신 속에서
크게 키운 사랑만이
다리를 절룩대며 솜을 타서 이고 지고
이불이 되어 덮인 세월을 추억합니다
밤바다 / 나호열
그를 만나러 감포에서 울진으로 간다
얼마나 먼 곳에서 숨차게 달려와 쓰러지는 것인지
너울대는 포말이 순간 흰 꽃으로 핀다
피었다가 지면서 파도를 움켜쥐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망막을 할퀼 때마다 길은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그를 만난 지 오래 되었다, 사랑을 잃고 타향에 몸 붙인 그를
이제야 만나러 간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 밤길을 달려 방파제 끝에서 서성였는지를
왜 막막한 바다에 줄을 던져놓고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두 병씩 마셨는지를
밤바다의 울음이 두통을 일으킨다
흐드러지게 핀 흰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꺾어 길을 막는다
그가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서둘러 이야기한다
외로운 사람이 바다로 간다
사시사철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는 흰 꽃을 보러 바다로 간다
외로운 사람보다 더 외로운 것이
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다로 간다
그는 울진 방파제에서 실종되었다
마릴린 먼로 / 최정란
지붕 위에
마릴린 먼로가 앉아 있다
박꽃 진 자리
새봉분처럼 둥근 엉덩이
하얗게 까붙였다
구멍 뚫린 어둠에
바짝 붙어 앉아
눈을 반짝이는 별들
찰칵, 몰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샤넬 No, 5
향기가 찍혀나온다
아찔한 외출이다
-시집 <여우장갑> 2007년 문학의전당
여우장갑 / 최정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앞발이 쏘옥 들어가는 작은 주머니 같은 장갑입니다. 여우가 앙증맞고 깜찍한 앞발을 밀어 넣습니다. 눈 덮인 하얀 겨울산을 향해 귀를 세웁니다. 눈 위에 콩콩 발자국을 찍으며 작고 예쁜 여우가 뛰어갑니다.
이제 발 대신 손이라고 불러야 하는 앞발을 엉거주춤 들고 여우는 직립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장갑 한 켤레 때문에 여우가 직립을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중학교 일 학년 교과서에 직립이 인간을 다른 짐승과 구별하는 요소라고 쓰지 않을 것입니다. 앞발을 사용하게 된 여우들의 문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우들은 여우문명의 발상 원인을 한 마디로 장갑 때문이라고 밝힐 것입니다. 최초로 장갑을 낀 여우를 기억할 것이고 그의 영생을 위한 피라미드를 세울 것입니다.
아니, 여우들만 올라갈 수 있는 비밀스런 곳에 여우장갑 한 송이를 피워두고 사람들의 것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릅니다.
보드라운 흙이 맨살에 닿는 날 것의 느낌, 차가운 눈이 발에 닿아 온몸의 세포들이 찌르르 살아나는 느낌을 모르고, 사람들은 쓸모 없는 물건들로 앞발을 무디게 욱죄는 참 이상한 취미를 가졌다고 깔깔거리며 웃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우장갑은 현명한 암여우처럼 제 몸을 좀체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직도 덫에 걸리지 않고 잘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여우장갑을 보호하고 계시거나, 보관하고 계신 분은 부디 연락바랍니다.
-시집 <여우장갑> 2007년 문학의전당
첫사랑 /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시인에게 온 편지 / 이기인
청송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밥풀냄새가 난다 그쪽도 내 독자다
지금은 봄이군요 그리고 아무 말도 없다
새순이 돋아서 좋다 꽃이 피어서 좋다
그쪽도 어쩌다 내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좋다
검열한 편지지 속에서 삐뚤삐뚤 피어난 꽃
볼펜 한 자루에서 피어났다
오늘은 저녁 쌀 씻다 한 줌 쌀을 더 씻다
파도가 있는 우리 동네 / 권주열
요즘 시내에 가면 많은 가게문들이 자동이다. 자동이라? 스스로 열리고 스스로 닫히다니, 그것은 참 오래 전에 우리 동네에서 먼저 시작 되었다. 파도는 자동이다. 우르르 몰려 와 스르르 밀려가는 자동문이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 바다를 열고 닫는다. 그 자동문 안에서 해삼을, 물고기를, 배를, 수도 없이 들고 나오는 사이에도 시내 백화점 그 문처럼 자주 -고장중- 이거나 우리 동네 전력을 더 축내지 않는, 그 자동 배터리는 지금쯤 동네 산 어귀에 둥그렇게 걸려 있다
떡집을 생각함 / 권혁웅
우리 집에 없는 건 그 콩가루였네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쑥떡 쑥떡
씹듯이 우리를 건너다보았네
우리는 얻어맞은 찹쌀처럼
차지게 손을 잡았지 개피떡에 든 소처럼
조그맣게 웅크렸지 그가
아픈 자리마다 참기름을 발라주었네
먹다 남은 막걸리와
뜨거운 물을 멥쌀에 개어 증편을 만들 때엔
우리 마음도 함께 증발했지
그래, 우리는 그렇게 그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나는 백설기처럼 마음이 하얗게 되네
어머니의 맷돌 / 김종해
맷돌을 돌린다
숟가락으로 흘려넣는 물녹두
우리 전가족이 무게를 얹고 힘주어 돌린다
어머니의 녹두, 형의 녹두, 누나의 녹두, 동생의 녹두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녹두물이
빈대떡이 되기까지
우리는 맷돌을 돌린다
충무동 시장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의 남폿불이 졸기 전까지
우리는 켜켜이 내리는 흰 녹두물을
양푼으로 받아내야 한다
우리들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맷돌일 뿐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타리로 서서
우리들의 슬픔을 막고
북풍을 막는다
녹두껍질을 보면서 비로소 깨친다
어머니의 맷돌에서
지금도 켜켜이 흐르고 있는 것
물녹두 같은 것
아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밭고랑에 묻힌 화투짝 / 유홍준
밭에 나가 일하다보면
간혹 밭고랑에 반쯤 파묻힌 화투짝 같은 거 발견하게 된다
그림도 생생한 그것 주워들고 싱긋 웃어보게 된다
쓰레기통이나 아궁이에 들어갔어야 할
화투짝이
어떻게 여기까지?
노름장이 아내가 분통이 터져 집어던졌을 것이다
거름에 딸려 왔을 것이다
거름에 묻혀 왔을 것이다
썩지 않는 화투짝을 주워들고
나는 빙긋이 웃으며 들여다본다
버려져도 거름과 함께
밭고랑에 버려진 화투짝은 경고장일 것이다
레드카드일 것이다 마침내 퇴장명령일 것이다
화투짝 집어던진 노름장이 아내, 그녀는 분명 내 어머니일 것이다
-<문학들> 2007년 봄호
한 사내를 만들었다 / 문정희
과천 뒷산 작업실에서
조각가 K의 흙으로
한 사내를 만들었다
푸르른 내 시간의 물방앗간에서
고딕체로 쿵 쿵 방아를 찧던 남자
오늘은 흙 묻은 손으로
눈과 어깨와 전신을
꿈틀거리는 입술을
진종일 만지고 주물러
내 앞에 분명하게 세워놓았다
이제 남은 일은
수천 도의 불로 사랑을 깨우는 일뿐
그리고 그를 껴안고
당당하게 내 집으로 데려오는 일뿐이다
마치……처럼 / 김민정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작품
나무 아래서 / 임동윤
아버지는 죽어서도 여전히 키 큰 나무다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는 썩고
그 곳으로 벌레들이 몰려와 집을 짓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가지마다 연둣빛 자식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키워내는 가을이면
아버지는, 한 그루 풍성한 세상의 나무였다
그러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궈버렸다
바지런히 물 뽑아 올리던 뿌리도 말라버리고
햇빛 맘껏 끌어당기던 연둣빛 눈들이
시들시들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죽음 중에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
그 성스런 최후가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아버지를 닮는 것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자면
비바람 모진 세월 오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짓는 집들은 너무 작고
눈보라를 감당하기엔 아직 허술하다는 것을
이 고요한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려고
바람은 국망봉까지 찾아와
푸른 잔디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잎을 피운,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장식한 저 나무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거룩한 희생임을나는 안다,
바람 많은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아버지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사모곡 / 신달자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어머니 / 오탁번
어머니,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습니다
어머니!
그 말이 가슴을 쳤다 / 이중기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
밥이나 먹고 보자며 자장면 집으로 몰려가자
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
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돼
쌀 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
밥은 안 먹고 뭐! 수입 밀가루를 처먹어?
에라 이 화상들아
똥폼이나 잡지 말든지
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 일주문을 부숴 버렸다
-13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
왜 그랬나요? / 이수진
길바닥에 누워버린 들꽃처럼
바람에 지쳐버린 나무처럼
짐도 없지. 짐도 없지.
그 저 그저 살아온 거지.
버릴 것도 없고
이룰 것도 없고
배 따뜻하면 만족하지.
더 딘 더딘 아이처럼
발끝마다 가시가 솟아나도
울면 그만이지. 울면 그만이지.
얼음 속에 눈 녹아 들어가듯
추운 마음 익숙하여
울 수도 없었지.
그저 흉내 낸 거겠지.
시계바늘 돌아가듯
익숙한 하루태엽들
버젓이 내게 감기며
하루하루 노래하며 지내는
베짱이 신세였지.
그래 그게 나였지.
(심사평)
전년보다 응모작품 편수도 훨씬 많고 수준도 높았다. 아쉬운 점은 내용이나 수준이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많고, 산문인지 운문인지 구별이 안가는 시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좋은 시를 제대로 찾아 읽지 못한 결과로 보였다. 예컨대 우리 시를 폭넓게 접하는 대신 최근의 신춘문예 당선 시 등 젊은 사람들의 시만을 중점적으로 공부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또 시는 산문과 달리 응집성이 있어야 하고 폭발력이 있어야 하는데, 평이한 전개나 설명으로 산문과 구별이 어려운 시들도 많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하지 않고 수다스럽고 혼란스러운 것도 많은 시들이 공통으로 가진 흠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수진, 조명수, 박흥순의 시들은 이런 흠이 덜할뿐더러 개성이 강하고 아주 재미있게 읽혔다.
특히 이수진의 시들은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왜 그랬나요?’이나 ‘최면술’은 경쾌하고 나이브하면서도 어떠한 우리시와도 같지 않은 목소리의 시다. 남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투른 것 같은 말투, 덜 익은 것 같은 발상도 만약 자신이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오히려 큰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아주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완성도만 가지고 본다면 조명수의 시들이 더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때 낙타처럼/ 굽은 아버지의 등을 증오했다”는 진술의 ‘아버지의 등’은 호소력도 있고 감동도 준다. 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고 만져 본 것 같은 구절들이다. 박흥순의 ‘꽃잎이 바르르 떤다’는 산문이 아닌 시가 갖는 재미를 충분히 맛보게 해 주는 시다. ‘양파’도 말을 적당히 절제하고 생략한 점에 있어 다른 이들의 시와 크게 구별된다. 한데 어느 한구석 빈 것 같은 느낌을 어쩔 수가 없다. 이상 세 사람의 시 가운데서 선자들은 이수진의 ‘왜 그랬나요?’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놋수저 / 정진규
어머니가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 올리는 삽시(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오미자술 / 황동규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염산(鹽山)에서 / 장옥관
왕소금에 썩썩 썰은 돼지고기 몇 점
소금포대 나르다 새참 먹는 일꾼들 틈에 끼여
공으로 얻어먹는 탁주 한 사발
오리들이 뒤뚱대며 길을 건너고 있다
어질머리 붉은 해가 섯등* 갇힌 바다에 빠져든다
길 옆 논에는 불을 뿜는 싯푸른 볏잎들
바다는 멀어도 고기떼 지나는 소리 잘 들린다
*섯등: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 때 바닷물을 거르기 위해 둘러막은 장치
연초록의 이삿날 / 안도현
연초록을 받쳐들고 선 저 느티나무들 참 장하다
산등성이로 자꾸 연초록을 밀어올린다
옮기는 팔뚝과 또 넘겨받는 팔뚝의 뻣센 힘줄들이 다 보인다
여기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더 가져가겠다는 뜻 없다
저수지에도 몇 국자씩이나 퍼주는 것 보기 참 좋다
연애론 1 / 김백겸
연애는 낮과 밤에 서로 다른 가면을 쓰는 태양과 달이다
연애는 증오의 연료가 뜨거울수록 화려한 사랑으로 타오른다
연애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과대 광고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연애는 거미줄처럼 얽힌 회로를 타고 관계망을 돌아다닌다
연애는 문명이 진화할수록 복잡한 만다라로 간다
연애는 스스로 제단을 세우고 신도를 모은다
사랑을 하려는 자여
연애지식을 쌓고 경험을 모아 바벨탑을 이루어야 한다
신이 연애를 괘씸하게 여겨 모든 관계를 휴지로 만들 때까지
연애가 그물로 잡아낸 모든 기쁨과 슬픔들이 폐허가 될 때까지
그만 파라 뱀 나온다 / 정끝별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애를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을 보면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을 보면 대체로 모질다
속 좋은 떡갈나무 / 정끝별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단팥빵1 / 정끝별
빵집에 단팥빵 빵 일곱 개
맛있게 생긴 단팥빵
한 사내가 빵 사러와
아줌마, 단팥빵 하나 주세요
여기 있어요
단팥빵 한 개 사갔어요
빵집에 단팥빵 빵 여섯 개 포동포동한 단팥빵
아이들이 빵사러 와
아줌마, 단팥빵 여섯 개 주세요
여기 있어요
단팥빵 여섯 개를 사갔어요
빵집에 단팥빵 빵 없네
어떤 맛이었을까 단팥빵
빵 주인이 빵 사러 와
아줌마, 단팥빵 다 주세요
다 없어요
단팥빵 빵들을 가져갔어요
다 어디갔지? 달디단 울엄마!
사과 껍질을 보며 / 정끝별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씨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진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 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는데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해당화 필 때 / 손수미
창을 활짝 열고 이층의 여자는 아래층 해당화 향기를
끌어당기고 있다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의 상반신이
창문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아래층 해당화도 덩달아 고개를 젖히고
여자를 향해 붉은 향기를 밀어 올린다
조.금.만.더.
향기는 아래층과 이층의 정점인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부위에서 그만, 추락했다
아~이 실패한 체위를 속상해 하듯
여자는 줄담배를 핀다
해당화 붉은 꽃이 사.랑.해 하고 쿨룩거리자
여자는 단호하게 창문을 닫아 버린다
여자의 슬리퍼 소리가 오후 속으로 들어간다
전화가 울린다
이층의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각의 다방이 남편처럼 여자를 껴안고
오후의 적막 속으로 잠자러 간다
손님이 없는 다방으로 노을이 들어간다
제기랄,
해당화가 붉은 향기를 자꾸만 쏘아올린다
청사포 사진관 / 손순미
바다가 전용 배경인 사진관은 비어 있다 가끔 파도가 들렀다 가고 벽에는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 유물처럼 걸려 있다 그들은 추억을 포기한 것이다 점포세가 놓인 사진관은 종일 손님이 들지 않는다 그들 삶은 다시 인화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밀물다방 오토바이 커피 대신 레지를 날라대는 소리 포구를 밀고 간다
해의 긴 렌즈가 사진관을 포착한다 활어차가 지나가고 생선장수가 지나가고 술취한 사내들이 지나가고 저녁 어스름도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고무대야에 얹혀 간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사람들이 뱃머리를 돌리며 사진관쪽을 건너다 본다 삶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해의 긴 렌즈가 남아 있는 빛마저 찍어간다 깜깜한 포구는 거대한 암실이다 사진관은 그 암실에 맡겨진다 밤새 현상된 풍경은 사진관에 다시 내걸린다 아무도 그 풍경을 찾아가지 않는다
제비 / 손순미
공사장 15층에서 그는 낮잠에 빠졌다. 꿈속에서도 망치질을 하는 듯 두 손을 불끈 쥐고 있다. 14층, 13층, 느슨한 잠의 엘리베이트를 타고 그의 영혼은 두고 온 지상의 집을 다녀간다. 여~보, 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내의 배꼽 같은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아내의 이름처럼 부드럽지만 쓸쓸한 집의 목소리. 그는 집안 곳곳에서 아내가 버리고 간 추억을 뒤진다. 낡은 슬리퍼, 물방울무늬 원피스... 여보, 우리는 제비 같아요, 평생 남의 집 처마 밑만 떠돌며 살아 왔으니. 그때 아내의 눈이 우물처럼 깊어져 있었던 것인데, 세상 어디에 살아도 지구의 처마 밑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뭐! 아내는 돌아올 것이다 아내는 돌아올 것이다. 나의 처마가 그리워 지지배배 제비처럼 돌아올 것이다. 그가 외우는 봄날의 주문에 황급히 피어나는 불안한 꽃들.
목단꽃 이불 / 손순미
내가 버린 이불이었나
낯익은 목단꽃 이불
지하도 사내의 몸을 덮고 있다
비켜요 비켜, 구두들의 소란에
들썩이는 사내의 잠
목단꽃 이불이 자꾸만 새나오는 사내의 잠을
꼬옥 덮어 주고 있다
밥처럼 따뜻한 잠을 배불리 먹으며
사내의 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목단꽃 붉은 옷을 입고
사내는 까마득한 유년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의 등짝에 오래 보관되어 있던
그리운 집 하나가 나온다
얘야, 어서 오너라
아직도 어미의 젖은 저 우물처럼 마르지 않았단다
세상 어디에 어미 만한 집이 있더냐
이미 익을 대로 익어 버린 사내에게
젖은 물리고픈 어머니는 사내의 잠을 두드린다
얘야,
목단꽃 붉은 이불이 둥실 떠오른다
그 집에 내리는 비 / 손순미
이웃들의 수다는 끊겨 있고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빈방과 거실 버려진 모든 것들이 버려짐으로 살아 있다 그들은 모든 슬픔을 무책임하게 장악하고 있다 사방으로 매달린 녹슨 창문은 그 슬픔이 빠져나갈 틈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썩은 반찬 냄새가 아우성치고 있다 푸른 냄새의 공화국이 생겼구나 그 곳엔 또 다른 生이 은밀한 번식을 하고 있다 액자 속의 가족들은 단장된 거실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웃음은 버려져도 웃고 있다 꿈은 서둘러 그 배경을 빠져나가고 집은 침묵을 장기 수혈 받고 있다 이 집의 힘은 저 버려진 웃음 속에 있을까
전기가 끊긴 집에 어둠이 들어온다 흐트러진 집안의 집기와 모든 슬픔들이 그 어둠에 안긴다 근처 아파트 불빛이 밤새도록 집의 내력을 밝혀 내고 있다
그림자 / 안시아
뜨거운 한낮은 햇빛 가마터다
달궈진 태양이 먹빛으로 빚어지는 오후
그림자가 뚜벅뚜벅 골목을 가고 있다
태양은 제 몸을 달궈 가장 어두운
그늘 하나씩 만들어주는 셈,
뜨거운 최후까지 검은 빛으로
반대편을 반사한다
태양을 향한 직립이 담벼락 그림자를 휜다
길 한 켠 나무 아래로
두 개의 그림자가 교차해간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그늘의 경계를 지워 가는 것
바람이 햇살에 담갔다 올린 나뭇잎이
유약을 입은 듯 반짝이고 있다
담벼락에 그림자 문양이 하나 둘 스치고
발걸음은 물레처럼 골목을 회전시킨다
뜨겁게 재벌구이 되는 오후가 지나면
가로등이 높은 곳에서 몸을 데우며
둥근 저녁을 빚어놓을 것이다
세상의 굴곡은 거대한 도공의 손길이다
의자 / 안시아
바닷가 선창,
다리 하나 부러진 의자가 있다
거뜬히 서 있을 수 있다는 듯
세 개의 앙상한 다리만으로도
텅 빈 허공을 버티고 있다
다리를 잃은 후 스스로 버려져
이곳까지 떠나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자는 어느 곳 하나
은밀한 곳이 없다 오직
버티기 위해 살아왔을 뿐,
그 꼿꼿한 중심이 평생 의자를
의자로만 눌러 앉힌 것이다
의자에 앉아본다
으랏차차! 무게중심이 급기야
잃어버린 다리 쪽으로 엉덩방아를 찧게 한다
멍울진 자리 덮어주던 파도가
흠칫 놀라 한 걸음 밀려나간다
이제 의자의 중심은
그 위에 앉는 엉덩이의 몫이다
스스로 중심을 잡는 사람만이
의자를 쓰러뜨리지 않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 전 언제 한번
의자를 배려한 적 있었던가
다시 의자를 세워 놓는다
다리가 세 개이고도 여전히 의자인 의자 하나가
부러진 다리의 무게중심을 서로 나눈 채
바닷바람을 버티고 있다
의자가 걸터앉은 백사장을 보라
중심 없는 것들만 휩쓸려 다닌다
새우탕 / 안시아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추억의 수위는 수평선을 넘나들고 앗, 끓는 바다를 맨 입술로 그 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그 날도 노을빛이 퍼졌다 그 흔적, 바다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바다에 추억을 데이고, 입안이 까실하다 텅 빈 용기 안, 수평선이 그을려 있다
그녀의 숲 / 안시아
여자는 펼쳐둔 나물 옆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숱이 빠진 머리 칼은 시들어 부석거렸고 툭 불거져 나온 발꿈치는 길을 반쯤 꺾어 신은 채 갈라져 있다. 후 - 연기를 피워 올릴 때마다 무언가를 걸러내듯 숨을 몰아쉬던 여자, 몸 속에 뿌리내린 구근들은 이미 우거질대로 우거져 있다. 깊어지고 있다. 자꾸만 무언가를 키워내고 있다 여자는,
여러 텃밭을 옮겨다니다 결국 제 몸속에 둥근 세상을 내린다. 쏟아버릴 것이 많아 그 숲속, 벼랑을 잊지 않고 세운 여자, 들썩일 때마다 뿌리가 드러난다. 까맣게 시들어 가는 저녁, 누군가 떨이해 간 그녀의 숲이 비닐봉지에서 뿌리의 기억을 더듬는다. 시한부로 머뭇거리는 연기들, 바닥위로 떨어지는 담배꽁초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오후 / 안시아
책상 끝 동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법 멀찍한 곳까지 온 몸으로 또르르 길을 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원을 그리다가
또 하나의 원으로 끝내 눕는다
연산기호같이 셈해지던 나날들,
창틈으로 햇살이 아득히 녹슬어 있는 기억을 비출 때
동전은 어떤 해답으로 이곳까지 거슬러 왔을까
손끝으로 동전을 줍다가 그만 놓치고 만다
바닥의 중심을 퉁겨내며 굴러가는 동전,
때론 가장 절박한 순간이 生의 궤적을 그린다
가만히 주워 올린 손끝에서 또다시
낭떠러지가 되는 오후,
한껏 차 오른 봄날이 위태롭다
컴퓨터 모니터는 이따금씩 보호색을 띄며
갖가지 모양의 도형을 빙글빙글 돌린다
책상 귀퉁이 싸인펜이 휴지뭉텅이에
검은 노을을 풀어낸지 얼마나 되었을까
창 밖, 자전거 바퀴가 길을 일으켜 세우며
언덕을 오르고 있다
장마에 갇히다 / 이동호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 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빗소리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 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한 밤 중의 창세기 / 이동호
방안에는 아내의 배가 노아의 방주처럼 정박해 있다.
아내의 부푼 배가 자꾸만 들썩이는 이유를
방주 속 삼백 예순 다섯 종의
날짐승과 길짐승 때문이라고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밤마다 잠을 설쳤다.
아내는 자꾸만 맹수처럼 코를 골았고
전원을 꺼놓지 않은 TV는 한밤 내 비를 쏟았다.
창 밖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네온사인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술집의 타락한 형광등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불연 지붕 위에 신의 사자처럼 먹구름이 몰려왔다.
모든 지붕 위로 심판의 빗줄기가 그어졌다.
땅 위로 무수한 방언들이 쏟아졌을 때,
아내의 배가 서서히 노 젓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된 아침을 찾아 동승한 비둘기,
아내의 배가 가 닿아야할 아라라트 산은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아직도 내겐 한 장의 푸른 감람나무 잎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문득 뱃속에 새 생명을 싣고 잠든 아내의 얼굴이
성경 속 말씀처럼 편안하게 보였다.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감람나무 이파리처럼
맑은 한 장의 웃음을 찾았다.
나는 잠든 아내의 배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방주가 내 품에
포근히 정박해 왔다.
콩나물국, 끓이기 / 이동호
사내는 뚝배기 속으로
지휘봉을 가져간다
도에서 끓기 시작한 뚝배기 속의 음표들을
사내는 지휘하듯 휘휘 내젓는다
음계는 금세 높은음자리로 음역을 높인다
이 음악은 너무 뜨거워 맛보기가 힘들다
사내는 입술을 오므려 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뚝배기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소리가 완전히 익기까지는
시간을 조금 더 끓여야한다
사내는 잠시 식욕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 나뭇가지가 세상을 휘젓는다
공중 부양하는 수많은 손바닥들
손대기에도 너무 뜨거운 세상 때문이다
땅의 뚝배기 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뭇잎이 몸을 굴린다
사내가 삶의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뚝배기가 심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뚝배기를 식탁 쪽으로 옮긴다
사내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에 숟가락을 끼운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음표들을 입으로 분다
음표들이 낮은 음계에 도달한다
뒷모습이 콩나물인 사내가
음악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한 소절의 생이 고스란히 입안에서 씹힌다
창 밖 저녁노을이,
얼큰하다
폐가廢家 / 이동호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려 있는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우체부였다
감나무에는 우표가 무성했으므로 그의 혼은
무사히 하늘로 잘 배달되었으리라
감나무는 그의 육신을 양분으로 더욱 붉었지만
곧 지상으로 힘없이 난무했다
그에 대한 억척의 소문들도 모두 붉어갔다
경찰은 경찰답게 그의 주검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으로 귀납 추리했고
마을은 이웃답게 주검에 대한 연민을
혀 밑에 묻었다 담벼락 밖으로
뚝뚝 떨어진 소문일수록 바람에 실려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
철새들이 날아올라 서녘하늘에
단풍잎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집은 끝내 함구했다
그가 가꾸다만 황폐해진 가을 속으로
참새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혀를 찼다
바람이 그가 매달려있던 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그가 신고 다닌 마당의 발자국 속으로
밤새 서리 내리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잡초 속에서 마지막으로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해 겨울
답장처럼 눈이 내렸고
지붕은 상복을 입었다
상주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감나무의 가지가
툭 꺾이고, 최후로 그가 벗어둔 장화 속으로
침묵이 고여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그의 발자국이 하나 둘 새로
돋아났다
비와 목탁 / 이동호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내 마음의 협궤열차 1 / 이가림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떠난다
너의 간이역이
끊어진 철교 그 너머
아스라한 은하수 기슭에 있다 할지라도
바람 속에 말달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열띤 기적을 울리고 또 울린다
바다가 노을을 삼키고
노을이 바다를 삼킨
세계의 끝
그 영원 속으로 마구 내달린다
츨발하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뻘에
처박히고 마는 내 철없는 협궤열차
오늘도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한 량 가득 그리움 싣고 떠난다
석류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보랏빛 남쪽 / 강인한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싱싱한 초록이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잎에 앉은
청개구리
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변두리에서 1 / 강인한
전셋방을 얻으러
몸뻬 입은 여편네가 소개쟁이를 따라 나선
신개발지구 배추밭 샛길은 질척이고
살얼음 끼인 미나리깡을 돌자
염소 울음 소리가
찬밥 덩이처럼 시리다.
건너편 아파트 신축 공사장 주변엔
죽창 같은 삼각 깃발이
음산한 겨울 바람을 날리고,
새로 낸 소방도로의 한쪽에 비켜 앉아
무심히 철근을 끊는 인부가 둘.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버짐 피듯 눈발이 흩어져 있다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말복 / 손세실리아
퇴화된 날갯죽지가
축 처져 녹아 내리는 냉동 닭을 손질한다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
해체된 닭을 들여다 보다
기억의 허방에 잠시 발을 헛딛고 만다
가혹한 쓸쓸함이다
압점 / 손세실리아
옥돌 몽돌 차돌 뿐 아니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자갈을 콘크리트에 꼿꼿이 박아놓고 맨발로 걸으란다 고장난 오장육부의 막힌 혈을 뚫으려면 어지간한 고통쯤은 참아낼 줄도 알아야 한단다 옹이 박힌 발바닥 내딛는 부위마다 비명이다 그새 또 병이 깊어진 게다 자갈의 둥근 이마를 짚고 맨발마당을 한 바퀴 돌아나오는 동안 발바닥 신경분포도 옆 공용신발장에서는 밑창 닳고 뒤축 꺾인 신발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등 돌려 서있다 어느 한 군데 성한 곳 없는 생의 환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정면으로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다람쥐 쳇바퀴 돌린다'는 말 / 손세실리아
대낮엔 톱밥 속에 파묻혀 꼼짝도 않던 햄스터란 놈이 자정만 넘으면 새장만한 집 쇠살에 거꾸로 매달려 기어다니다 낙상하기도 하고 동틀 무렵까지 플라스틱 쳇바퀴를 하염없이 돌리기도 한다 처음엔 신기하고 귀엽더니만 닷새쯤 지나자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영민한 생김과는 달리 무망(無望)한 헛발질로 밤새 소란 떠는 꼴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슴새벽, 덜컹거리는 소요에 잠이 깼다 세상에! 바퀴 살과 살 사이 촘촘한 틈새로 봉숭아 떡잎보다 쪼끄만 발이 푹푹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빠진 한쪽 발은 잽싸게 빼내 회전하는 살을 붙잡고 수습된 나머지 발은 다시 허공 향해 내딛는 거침없는 질주를 지켜보다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돌아보면 숨통 조여오는 사방 쇠창살뿐인 섬뜩한 집,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길, 시시각각 숨 조여오는 감옥 같은 폐쇄된 창살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려야만 비로소 그 안에 숲길이 열리고 알곡 그득한 먹이 곳간이 놓이게 됨을 알아차린 것일까 밤새 무모한 발길질로 날마다 새 길을 열어 가는 저 것들
허투루 흘려듣던 '다람쥐 쳇바퀴 돌린다'는 말
지워지고 끊어진 길을 잇는 구도의 출구가 그리로 나있을 줄이야
무덤에서 온 문자메세지 / 서안나
喪家 가는 길
종로 3가를 거치고 강남을 거치고
이 도시 끝으로 조문 가는 길
죽음 가까이에 가는 길은 형식이 필요하다
지하철을 두어 번 갈아타고 노선을 잘 익혀야 하고
죽음 반대편으로 들어서지 않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문득
망자가 누워있을 영안실의 냉동창고나 관속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싣고
지하철처럼 밤마다 세상을 떠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사방이 고요해지면 관속에서 굳은 관절을 풀며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안부를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낼지도 모른다
심심해서 그래 심심해서 그래
전화 한 번 해봤지 허허 웃으며
무덤 속까지 연결된 인터넷으로
동영상 편지를 보내올 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때까지
죽음이란 단어를 클릭 하면서
보다 확실한 죽음을 검색할지도 모른다
지층처럼 땅에 스며들면서 뼈를 비우면서
아는 이들을 하나씩 떠올릴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이 있어 산 자들의 생은 더 활기차다
산 자들의 활기찬 생이 있어서
죽은 자들의 눈빛은 더 숭고해진다
지하철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길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린다
문득 ,
돌아보니 지하철이 영혼처럼 쏜살같이 스쳐간다
익숙한 미소를 띠며 휙 멀어진다
스타킹을 신을 때면 / 서안나
잘 풀리지 않는 세상일처럼 조잡하게 말려 있는 두 가닥의 길. 풀기 없이 뭉쳐져 있는 길들. 그 길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 망사그물처럼 단단하게 조여오는 아픈 기억들.
스타킹을 신을 때면
열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잡아당기면 뱀 아가리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삼켜버리는 탄력적인 길들. 위험스런 길속엔 함정처럼 꽃들이 피고 지고. 꽃잎에 진딧물처럼 얹혀진 푸른 골목길. 푸른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담장에 기대어 조급하게 기침을 한다. 기침소리처럼 쏟아지는 꽃보다 습한 기억들. 골목에선 사람들이 잠 속에서도 두 눈을 감지 못한다. 검은 내장을 우우 떨며 담장들이 목덜미가 하얀 여자를 뱉아 낸다. 절벽처럼 각이 진 얼굴이 낯익다. 슬픈 내력을 지닌 무성한 소문들이 골목 안에 가득 들어찬다. 여자의 슬픈 발걸음이 낙타 발자국처럼 따뜻한 담장 안에 고요하게 찍힌다. 발자국마다 길들이 열린다. 길들이 여자를 휘감는다. 꽃잎들이 여자 목덜미에 서둘러 피어난다. 스타킹을 신다보면 꽃처럼 붉은 길들이 망사그물처럼 단단하게 조여온다
러시안 룰렛 하는 밤 / 서안나
난 날마다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한 게임 하실 까요?
물론 저녁 식사 값은 죽은 사람의 몫이죠.
어때요. 같이 한 번 해보실 래요?
방아쇠가 당겨질 때
손가락 끝에 죽음이 담배연기처럼 감겨오죠.
피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아마존 피라니아처럼 단단한 이빨을 빛내며
죽음을 맛보려는 눈초리로 몰려들겠죠.
시간의 감옥에 갇힌 내 얼굴 속에
어두운 영혼이 심장박동처럼 뚝딱거려요.
내 안의 피톨들이 뱀처럼 날름거리며
내 몸을 찢고 나오려해요.
죽음이 뱀처럼 차갑게 내 몸 안으로 흘러 들거 예요.
총알소리가 내 생을 스쳐갈 때
난 죽음의 멀티오르가즘을 맛볼테죠.
내 머리에 날마다 총을 겨누고
뇌수 속의 게으른 거리를 쏘고
찌그러진 양철 같은 해를 쏘고
들판에 핀 노랑제비꽃의 심장을 관통하고
멸종되지 않는 식물들을 관통시키고
날마다 내가 관통되고
그 너덜거리는 틈새로
새로운 세상이 재빨리 들어서요.
죽음이란 거 뭐 별건가요.
난 내일이면 게임 주인공처럼
신성한 영혼과 추억이 채워진 육체로
업그레이드되어 재림할걸요.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거 위대하지 않은가요?
한 방에 한 생이 날아간다는 거
폭죽처럼 터져 버린다는 거 신나잖아요.
총알이 내 머리통과 두개골을 날려버리는 날까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때요. 한 게임 해보실래요?
자 일단 먼저 돈을 내시고
저녁을 미리 주문해두죠.
피가 흐르는 당신 머리처럼
약간 덜 익은 신선한 스테이크와
당신 피처럼 붉은 포도주 한잔을 우아하게 주문할까요.
유령거미 / 서안나
나의 행성이 조심 조심 흔들린다
누군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섰다는 신호다
먹이가 걸려들면
행성은 죽음의 파장으로 술렁거린다
나는 내 비애로 짠 거미줄을 밟고 헤치며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긴 다리로 허공을 짚어나가
내 새끼가 자라날 먹이의 안전한 몸 속에
푸른 꿈을 주입시킨다
조금씩 마비되어 가는 먹이 속의 풍경들
행성에서 조급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악어처럼 숨을 죽이며
허공에 몸을 숨겨놓고
추락하는 이카루스 같은 먹이가
행성에 불시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도시의 어둠 속에 날아오르는
욕망의 날개소리를 빠르게 파악해야한다
내 안의 거친 식욕이 극세사로 방출되어
또 한 번 사냥감을 칭칭 동여맨다
이 세링케티에선
먹이가 걸려들 때마다
우주로 별이 하나 지고
조심스레 별 하나 뜬다
나의 행성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플롯 속의 그녀들 / 서안나
1.
너무 많은 날들이 흘렀다
골목 끝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사건은 이미 후반부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 도시를 떠나는 플롯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래된 통조림처럼 잔뜩 상한 그녀의 탈주계획은 예견된 것이었다. 소설 시작 부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몇천 개의 태양이 티슈처럼 구겨져 배경으로 버려졌다. 나와 S와 A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아침이면 부지런히 자신의 일터로 재배치되곤 했다. A의 역할은 나를 늘 번득이는 칼날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를 상처로 만들곤 다른 풀롯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버려진 태양과 도시와 빌딩과 카페와 푸른 초저녁이 주도면밀하게 A를 회상하는 복선으로 설정되곤 했다.
러시아 보드카
떠나간 A 그녀가 가끔 보내오는 편지의 행간에는 러시아식 보드카 냄새가 진하게 묻어있다. 편지의 내용이 경건할수록 밤이면 위축된다는 그녀의 말처럼 내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떠나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A의 경박한 문장이 경전처럼 읽히는 밤이면 B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가끔 S가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P의 술에 절은 중얼거림 들이 편파적인 나의 꿈을 비난하곤 했다. 나의 꿈은 형편없이 수축되었다. 편지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슬퍼질 이유는 충분했다. 우리들은 가끔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슬퍼지고 유쾌해지고 싶었다. 나의 과거는 우울한 기호들로 기록되어 졌다. 사건과 사건이 모여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사람들은 쉽게 사라졌다. 새벽이면 편지 속에서 나는 그녀들과 지루해지고 있었다. 엑스트라처럼 그녀들의 새벽을 맨 처음 산책하곤 했다. 언제나 모두가 위기였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아침이 되자 거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언제부턴가 절정 부분의 J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어있다. 익명의 사건들이 기호들이 다시 결말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때 미는 철학자 / 이해리
교수면 뭐하고 박사면 뭐 하능교
때 잘 나오고 팁 많이 주는 손님이 최고지
수성하와이 목욕관리사 아줌마들
철학자다, 필기구와 서책 없이 활딱 벗은
맨몸으로 체득한 때의 철학
단순 명쾌한 결론이 놀랍다
때 밀어 보믄 안다카이, 그 사람 성격, 신분 재력, 취미까지 다 보인다카이
몸매 이뿌고 맘씨 곱은 사람은 때도 수밀도처럼 수월한데 심술 사나운 심뽀에 인색해 빠진 몸띵이들은 때도 눌은 양철냄비 맹키로 애 믹인다카이, 그런 손님 만나믄 오뉴월 염천에도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야 일 할 수 있다카이
수증기에 쪄진 허벅지 트실트실 튼 살갗이
가문 고향의 논밭보다 아득한 자신의 몸은 볼 줄 모르고
발가벗은 남의 때에서 가득 껴입은 무엇을 통찰하는
쓸쓸하도록 단순한 결론이
내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은밀한 매복 / 이해리
이상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 걸면
한 마리 축 처진 톰슨가젤이 생각난다
축 처진 것을 걸고도 빳빳한 옷걸이는
톰슨가젤을 단숨에 사냥한 치이타일까
고요하고 하얀 달의 숨소리
이상도 하지
술 냄새를 풍기는 와이셔츠를 바라보면 왜
세렝게티 초원의 바람소리가 들리는 거지
점점 밀림이 되어가는 도시
넥타이를 풀어헤친 사막과 창 밖으로 몸 던지는 빌딩의
추락음이 들리는 거지
발톱을 세운 의자들이 의자를 할퀴고
몰카를 매단 자동차들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누군가를 노리는 눈알을 빛내고 있는 거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해서 더 팽팽히 긴장되는
섬유올 속 촘촘한 불안의 숨구멍
턱 언저리에 푸른 노을을 묻힌 채
혼곤한 잠 속에 빠져드는
시달린 숫사자가 보이는 거지
참 이상도 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 걸면
수의 패션쇼 / 이해리
강남 한복판에서 수의 패션쇼가 열렸다
죽음의 옷이 사람을 꿰입고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활보한다
산 사람이 죽음의 옷 속에 담겨 조용히
전시중이다 사람들은
수의 위에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조명발을 받은 수의는 이 세상처럼 환한데
수의 속 산 사람의 몸은 무덤처럼 캄캄하다
이제 죽음은
빙초산 맛 같은 불빛 아래 진열되는
상품이 되었다, 나는 후일
어떤 디자인에 맞춰 임종하게 될까
턱시도 수의, 드레스 수의, 무궁화 자수가 만발한
거들치마 수의
대로변에 버젓이 검은 입 벌리고 대기중인 납골묘
아직 새파란 사람들이 저축하듯 유서를 쓰고
영원한 안식인 죽음은
죽은 몸 부릴 곳조차 없다, 상여 붙잡고 울 틈도 없이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 번쩍번쩍 요란한
박수 소리만 흘려 보낸다
비누에 대한 비유 / 복효근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조선호박 / 복효근
잘 익은 조선호박은
자식 둘 기르며 허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몸매
내 작은 형수 엉덩이 같아서
신난간난 한세월 지긋이 뭉개온 토종의 저 둥근 표정이라니
그속엔
천둥 같은 가뭄 같은 것들도 푹 삭아서 약으로 고였겠다
이제는 따글따글 오뉴월 뙤약볕이 한 말은 여물어서
은빛 붕어새끼 같은 눈물 같은 씨앗들이
어둠 속 환하도록 빛나겠다
얼마나 깊은 궁륭일까
잘 익은 조선호박일 수록 큰 허공 하나 키워서
내 형수 엉덩이 두드려 볼 수는 없어도
누렁호박 두드려보면 들린다
뿌리야 거름구덩이 속에 박혔어도
지리산 줄기처럼 섬진강 줄기처럼 넌출넌출
벋어나간 호박덩굴 궁 궁 발울림 소리들
봄 햇살 함께 일어서선
늦서리 함뿍 뒤집어쓰고야 밭언덕을 내려와
죽은 시아비도 늙은 시어미도 바람같은 지아비도
저녁 한 밥상에 둘러앉히고
궁시렁 구시렁 쌀 안치는 소리
상차리는 소리 ‥‥‥
넥타이를 매면서 / 복효근
넥타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본다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의지로 내가 나를 묶는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목을 꺾겠다는, 또한 누군가를 꼬여 넘기겠다는 의지 그래서 무엇을 그럴싸히 변명하겠다는 듯 넥타이는 달변의 긴 혓바닥을 닮았다 그것이 현란할수록 끌려가면서도 품위는 유지하겠다는 위장술, 혹은 저 밀림 속으로 누군가의 멱을 끌고 갔었던 따라서 진즉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자가 제 목을 감추는 보호색일지도 모른다 잘 보라 또한 넥타이는 올가미를 닮았다 그것이 양말이 아니라서 목에 두르는 것은 아니리라 마지막이듯 넥타이를 조이며 묻는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는가
숫돌 /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무의 전모 / 복효근
늘 다니던 산길에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
지난해 태풍 루사에 쓰러져있다
그 얽히고설킨 뿌리를 하늘로 쳐든 채
하늘 치솟던 높이도
그 끝모를 깊이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한 때는 가지 가득 꽃을 피워
꽃등을 켜놓은 것처럼 언덕이 화안했었는데
바람이 잎을 되작되작 뒤집으면
햇살이 한 잎 한 잎
그 푸르른 영화를 연주하곤 했었는데
한바탕 광풍에 널브러진 거목이
하, 천연덕스럽게 평화로워
다가가 나무둥치를 발로 차니
썩기 시작한 나무껍질 아래서
와르르 �아지는 검고 하얀, 아뿔사!
‥‥‥개미 개미들 ‥‥‥
어느새 제 몸을 저 아닌 것들에게 내주었구나
그랬었구나
늘 위를 향한 턱없는 선망과
깊이에의 끝 모를 열망만이 아니었구나
그 보다는
수평을 향한 저 쓰러짐의,
저 내어줌의 자세까지가 나무였구나
내가 한 그루 나무라는 사실을
잊을 뻔한 즈음
육교 / 최을원
자정의 눈 내리는 육교 위
그녀는 地上의 가장 먼 마을에서 달려온 따뜻한 불빛들이
자신의 다리 밑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흘러가는 것들
캐롤도 흘러가고,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가로수들도
흘러가고, 술 취한 빌딩들도 흘러가고
...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 목욕탕...
달력의 붉은 동그라미 속에 웅크린 태아처럼 갇혀 있던 사흘간의 시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무너지고 무너졌다
수술대가 뗏목처럼 너울너울 떠가자 둥근 형광등들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
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
도시 전체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눈발이 그들의 발자국들을 빠르게 지워 갔다
가야하는데
가야하는데
기억을 빼곡이 채워 가는 눈발 속
육교 하나만 갈 곳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었다
벌레나무 하늘 오른다 / 최을원
경기도 하남시 인접지역, 누덕누덕한 지붕들 모여 있는 곳
나무 한 마리 하늘 오르는 것 본다
앙상한 발들 꼼질거리며 캄캄한 허공 끌어당기고 있다
작업은 다 끝난 것이다
부서지고 잘려나간 것들 수북한 슬레트 지붕은 뜯겨나갔다
갖가지 소음들 조립하다, 저녁이면
체구 작은 사내들 뱉어내던 낮은 건물들
국밥집에 모여 핸드폰 하나로 자랑스럽던 이국의 밤들아
지금은 떠나야 할 시간, 저 나무가
허랑방천 다 오르면 별자리 하나 더 생길 것이다
이미 별이 된 것들 흔들어 대는
저 상처 많은 손들을 보아라
저 나무가 밤하늘 끊임없이 떠돌 듯
가방 하나로 나도 이국의 질퍽한 곳을 떠돌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변두리의 풍경들
낡은 라디오가 밤새 토해내던 낯선 노래들
전신주에 붙은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TEL 01×-5××-56××"
빗물 흐른 저 전단지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 모든 벌레나무의 시간들을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용설란 / 최을원
용설란에서 사내 하나 걸어 나온다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저는 초로의 멕시코 사내
가구 공장 뜰에서 사포질, 니스칠하며
낡은 모포처럼 웃던 그 사내
그가 대패질을 할 때면
카리브 해안에서 경기도 마석 변두리까지
좁다란 길이 돌돌 말렸다가 떨어졌다
미간의 협곡엔 안데스 산정 늙은 콘돌이 둥지를 틀고
잉카의 오랜 전설 컥컥 거릴 때
굴곡 많은 사연들이 얼굴을 지나가고
움푹한 눈에 하나둘 들어서던 이국의 저녁들
야심한 다릿목에 나앉아 있던 나직한 메스티조의 노래
문득, 떠오르던 태양과 사막과 선인장과 용설란
천둥 사납던 날 그 노래, 모진 물살에 쓸려 갔다
내가 生의 한 국경을 건너왔을 무렵
하루의 끝에 서 있던 그 사내
천장 빼곡히 용설란 밭은 펼쳐지고
용설란 손끝에 찔려 밤의 곳곳이 쓰라리면
데낄라 노란 술병 들고 나타난 그 사내
데낄라, 데낄라, 데낄라
외치다가 지구본 위를 절룩이며 갔다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에 찍힌 그의 발자국
천장에 대팻밥 가득 남기고
먼 회귀선 아래로 가고 있었다
깊은 발자국 /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계간 <시와시학> 200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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