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 : 사진첩
나이가 들수록 사진첩을 보는 일이 잦다. 소박한 추억에 기대 살고 싶은 마음이다. 바람은 누구나 같은 걸까. 할머니께서는 요즘 부쩍 사진에 욕심을 부리신다. 문제가 있다면 사진첩에 있는 사진을 그냥 들여다보시는 게 아니라 일일이 떼어 내어 한참 들여다보고 주머니에 쓱 넣어 버리신다는 점이다. 사진첩에서 사진이 사라지고 있다. 모서리가 닳도록 눈맞춤하는 것은 할머니의 일과가 되었다. 할머니의 사진 속에서 시간이 정지한 것 마냥 할머니의 일상도 조용조용 숨죽이며 산다.
어머니는 말없이 할머니와 씨름 중이다. 할머니가 곤히 주무시는 틈에 도톰한 주머니를 뒤져 다시 사진첩에 사진을 단정히 정리해 넣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치매 증상 중 하나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필요 이상 집착하는 것이라고 담당 의사 선생님은 조언해 주셨다. 온전하고 맑은 기억의 할머니가 새삼 그리운 요즘이다. 다행스러운 건, 사진첩을 보시면서 말수가 많아지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과거와 즐겁게 소통하시면서 전과 다르게 활기차 지셨다.
뜬금없이 오래 전 한복을 찾으시기도 하고, 싫증나게 들은 잔치상 얘기를 때도 없이 되풀이하시지만 웃음이 묻어 난 할머니의 모습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치매 초기의 할머니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셨다. 깜빡이는 기억의 등불 아래 한숨과 눈물이 늘어만 갔다. 할머니 심경의 변화에 따라 가족들도 저마다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세월은 신이 허락한 공평한 약속이라 했던가. 언젠가는 나도 할머니처럼 가스불에 솥을 올려두고 까맣게 잊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하셨던 것처럼 다리미로 옷도 누렇게 태우고 불현듯 거주지의 동호수를 떠올리지 못해 발을 구를지도 모를 일이다. 훗날 그런 암울한 날이 오더라도 지금의 할머니처럼 온화한 웃음으로 긴 수다를 받아 줄 수 있는 가족이 함께이면 좋겠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흑백가족 사진이다. 사진첩의 맨 위에 자리 잡은 가족사진은 날마다 봐도 질리지 않으신단다. 사진 속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어색한 미소도 담겨있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애교 섞인 눈웃음도 녹아 있다. 너나없이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한껏 멋을 부리고 외출하신 할머니는 오래전 그날, 충분히 행복하셨던 모양이다. 주름살 없는 할머니의 눈매가 퍽 사랑스러워 보인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할머니를 두고 생겨난 말인가 보다. 가족사진에 유난히 강한 애착을 보이시는 할머니께 생신 선물로 가족사진 촬영권을 마련해 드렸다.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할머니를 통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는 걸 배웠다.
나의 깜짝 선물로 온가족이 단장하고 사진관을 찾던 날, 곱게 화장대에 앉아 꼼꼼하게 화장하시는 할머니의 설레는 표정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성은 늙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은 변지 않는다더니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동안 나는 할머니를 ‘아버지의 어머니’로만 생각했던 것일까. 화사한 한복 빛깔을 뽐내며 마치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셨다. 사진관 아저씨께서도 나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시고 서비스 사진을 몇 장 더 찍어 주셨다. 주인공인 할머니의 다소곳한 모습과 부모님의 다정한 포즈도 인심 좋게 담아주셨다.
촬영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오는 길에 할머니는 사진관 아저씨께 명함을 달라고 청하셨다. “지나는 길에 따뜻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파서 그려.” 아저씨는 넉살 좋게 웃으시며 답하셨다. “아이고 어머니, 얼마나 맛있는 걸 사주시려고 그러시나~” 아저씨는 시력이 나쁜 할머니가 눈을 찡그리지 않고 봐도 될 만큼 큰 글씨로 전화번호를 큼직하게 적어 주셨다.
새로 인화된 가족사진이 거실 중앙에 멋스럽게 걸리고 할머니는 만족스러우신 듯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웃으시는 일이 잦아졌다. 부쩍 식욕도 당기시는지 음식도 맛있게 드시고 마실 다녀오신 후에 층수를 깜빡하지도 않으셨다. 치매라는 병은 가족의 사랑과 관심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던 사진사의 번호라며 연락을 좀 해달라고 하셨다. “할머니~ 또 사진 찍고 싶으신 거죠?” “친구들이랑 노인정에서 단체로 사진을 박을 일이 있어서 그래. 내일 점심식사 함께 하자고. 거 뭐……. 예약하는 거 있다며? 그 양반 바쁠지도 모르잖아. 예약 좀 해다오. 중요한 사진 찍으러 간다고.” “네. 알겠어요. 어렵지 않아요.” 속으로 유난스럽게 사진 찍기를 종아 하신다고 잠깐 흉을 봤다. 다음 날, 할머니가 원하셨던 시간으로 예약해 드렸다.
그 후로도 종종 할머니 방에 들러 아버지 군대 시절 사진첩도 보고, 할아버지 소 모는 사진도 보고 촌스런 이웃주민의 함박웃음도 보았다. 일주일 쯤 후에 사진관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사진 찾아 가시는 걸 깜빡하신 모양이라며 손녀딸이 냉큼 찾아가라는 연락이었다. 인화비에 액자값이 조금 보태진다며 오기 전에 전화 한통 넣으라신다. ‘무슨 사진인데……. 액자까지 담으신 거지?’ 서둘러 잰 걸음을 걸었다.
낯익은 아저씨께 인사를 여쭈었다. “저희 할머니 친구분들 많이 오셨나요?” “…….” “사진 같이 찍으러 오시지 않으셨나요?” “이런……. 할머니가 말씀하지 않으신 모양이구나.” 멋쩍어 하시며 전해주신 액자는 다름 아닌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었다. 불현듯 슬퍼지고 눈물이 났다. 흐릿한 기억으로 생의 마지막 자락을 조심조심 정리하시는 할머니가 아프게 다가왔다. 그 때의 기분은 글로 형언하기 어렵다. 품에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품고 한발 한발 걷는데 눈물이 아롱져 앞이 잘 뵈지 않았다.
혼자만 알고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아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아버지도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노인네가 참 쓸데없는 일을 하신다니.” 더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어머니가 받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인데 자식들 수고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려는 그 마음이 오죽 하실까.” 상가에 조문객으로 가서 고인이 되신 분들의 영정사진은 보았지만 살아계신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마주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온 사진을 할머니께 전해 드렸다. 당신의 비밀을 들키신 할머니는 흠칫, 당황하시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셨다. “죽고 나서도 자식들 성가시게 할 게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미리 한 장 찍어 두었다…….” 말꼬리를 흐리시는 할머니께 연고 없는 미안함이 묻어 났다.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도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신다. 아직도 사랑하며 아껴드리며 해드리고 싶은 것이 많은데 이별을 준비하시는 할머니. 너무 자주 들여다봐서 꿈에도 선연한 돌잔치 사진을 틈만 나면, 보고 또 보시는 정 깊은 할머니. “사진 너무 자주 박으면 명이 짧아지는 겨.”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카메라만 들이밀면 ‘김치~치즈~스마일~’이 자동으로 나오는 나의 소중한 할머니. 깨끗한 정신이 드는 날이면 자신이 입으신 수의를 손수 맞추러 다니시고 선산 한번 휘돌아 훠이훠이 옷자락 날리시며 담담히 내려오시는 나의 할머니. 나도 훗날, 할머니의 세월이 되면 지금의 할머니 심정을 온전히 보듬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할머니가 미리 찍어 두신 영정사진은 장롱 깊숙한 곳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슬픈 듯 슬프지 않게. 아쉬운 듯 미련 없이.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코끼리의 죽음을 뒤따랐다. 야생 코끼리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코끼리 무덤을 향해 엉덩이를 실쭉이며 걷던 느릿한 걸음새가 눈에 선하다. 그렇다. 사진첩에 보관된 네모반듯한 인화지만이 사진은 아니다. 진짜 사진은 내 마음팍에 산다. 지난 기억 속에 늙은 코끼리가 무거운 걸음을 딛는 것처럼 할머니와의 만남은 모든 장면이 사랑이고 헌신이고 인내의 슬라이드다. 매일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추억과 조우하시는 할머니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좀 더 많은 시간 할머니와 사진첩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당신 마음에 아름다운 추억을 예쁘게 아로새길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릴 것이다. 사진첩의 가장 큰 장점은 기쁨의 순간을 회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눈물 나는 날 사진 찍는 일은 없으니까. 사진첩 안에선 슬픔도 웃고 아픔의 세월도 웃는다. 그저 지난 일, 허허 웃는다. 넉넉한 할머니의 마음처럼 꽤나 맘씨가 곱다. 이번 할머니 생신에는 두꺼운 사진첩을 한권 사드려야겠다.
- 노은희 경기도 남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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