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다림질을 한다. 구겨져 있던 옷들의 주름을 다린다. 남편의 셔츠를 편다. 그의 옷에는 세상살이의 구김살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제 막 중학교 새내기가 된 딸아이의 교복을 다린다. 그 애의 꿈만큼 쭈욱 당겨서 다린다. 둘째 딸아이의 치마를 자분자분 다린다. 리본이 달린 다홍치마에서는 금방이라도 나비들이 나폴 나폴 날아오를 것 같다. 하루 온종일 바깥에서 놀아도 하루해가 짧다는 막내아들의 옷을 다린다. 아들의 옷에는 장난기가 풀풀 난다.
아무리 심하게 구겨진 옷들이라도 다리미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접혔던 주름들이 반듯하게 펴진다. 다림질을 하다 문득 오른팔 안쪽의 흉터에 눈이 간다. 흉터는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희미해져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
유년시절, 엄마의 모습은 늘 다림질하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엄마는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었다가 푸우 푸우 옷감위에 분수처럼 흩뿌리고는 구겨진 주름들을 찬찬히 펴 내려갔다.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접혀져 있던 옷들은 엄마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곱게 펴져 나풀거렸다.
인근 도시에서 아버지와 함께 직장 생활을 하던 엄마는 주말이면 우리 형제들이 살고 있는 할머니 집에 왔다. 할머니 집에 와서는 나와 놀아 줄 시간도 없이 온종일 부산스럽게 일을 했다. 부엌에서는 한나절 내내 달그락 달그락거리며 맛있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오후에는 엄마와 큰언니가 세탁한 이불호청을 마주 잡고 힘주어 내리쳤다. 팽팽하게 맞잡은 이불호청을 동시에 텅텅 내리치는 소리가 집안 가득 평화롭게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엄마의 다듬이질. 엄마의 다듬이 소리는 또닥 또닥 또닥 어찌나 경쾌하고도 신나던지 나는 그 리듬에 맞춰 할머니의 조붓한 등을 따닥 따닥 두드려 드리곤 하였다. 엄마는 팔이 아플 때면 이따금씩 나를 번쩍 들어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선 옷감을 밟으라고 했다. 그 일은 내게는 아주 신나는 놀이였다. 나는 노래를 부르거나 숫자를 세며 꼬옥 꼬옥 옷감을 밟았다. 나른한 오후가 되면, 이불 호청이며 옷가지들이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 아래 집게에 걸려 오수를 즐겼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엄마는 다림질을 하곤 했다. 그러던 엄마가 하루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아주 오래 오래 다림질만 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내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엄마, 일곱 밤만 자면 올 거지?”
“·······.”
“엄마, 일곱 밤만 자면 꼭 올 거지?”
“으응.”
엄마가 다림질 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나는 무던히 졸음이 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자디잔 물거품처럼 번지는 노을빛만이 툇마루에 내려와 있었다. 허공엔 옷가지들만이 펄럭이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가 떠나고 난 빈 자리는 화산 분화구의 웅덩이처럼 깊었다. 나는 그렁그렁해진 외로움을 눈에 가득 단 채 엄마가 올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일곱 밤을 잤는데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 왜 안와? 엄마, 왜 안와?’를 웅얼거리며 기다리고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고모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며 우리들의 눈치를 보며 두런거렸다.
동구 밖까지 나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엄마를 기다렸지만 매 번 딴 사람이 나타났다. 그럴 때면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복받쳤다. 고모들은 어린 것이 저희 어미를 닮아서 저렇게 청승을 떤다고 나무랐다. 기다리다 지쳐 툇마루에서 울다 잠든 나를 언니들이 안고 들어가는 날이 잦아졌다. 요에다 지도를 그려 놓는 날도 점점 많아졌다.
엄마를 기다리기에 너무 지친 어느 날, 나는 벽장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다리미를 꺼냈다. 엄마가 사 주신 예쁜 주름치마를 곱게 다려 입고서 엄마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가에만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엄마가 하듯이 다리미를 콘센트에 꽂고 옷 위에 쓱쓱 문질렀다. 재미있었다. 다리미가 ‘쓰으쓱’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치마 주름이 예쁘게 펴졌다. 그 때 할머니가 들어서는 소리가 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다가 다리미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자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어깨와 오른 팔에 붕대가 친친 감겨져 있었다.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우다시피 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은 여기서 거의 끝이 났다. 나는 그 후로는 엄마를 애써 기다리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이로 점점 성장해 갔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왔다. 외가에 가 있던 엄마를 아버지가 통사정해서 모셔 왔다고들 고모들이 전해 주었다. 엄마는 한동안 아버지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아버지가 휴무라서 집에 있는 날엔 온종일 입을 꼭 다문 채 다림질만 하곤 했다. 엄마는 무엇을 그리도 반듯하게 펴고 또 펴고 싶어 했을까? 무성하게 돋아나는 온갖 복잡한 생각들을 다리고 또 다리는 것일까? 그러나 이미 내 작은 가슴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던 외로움과 원망은 아무도 펴줄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한동안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가슴 속 깊은 주름이 되어 남아 있었다.
지난 주말에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아이구, 내 새끼들 왔구나. 꽃도 이리 곱지는 못하지. 요놈들만 보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펴지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손자들은 이리 귀애하시면서 어떻게 어린 우리들을 할머니께 버려두고 가버릴 수가 있었느냐고 생전 처음으로 말에 가시를 잔뜩 넣어 어머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머니는 한참동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아무런 말이 없으셨다. 이윽고 어렵게 말문을 여셨다. 그때는 아등바등 맞벌이 하느라 사는 게 늘 고단하였다한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얹어주었고. 상처 때문에 생긴 고단한 주름과 아버지에게 접었던 마음들을 펼 시간이 필요했다한다.
“그러나 고단한 주름을 펴 주었던 것은 너희들이었어. 니도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살거라. 사는 게 뭐 별거가. 가족들끼리 서로 고단한 주름을 펴 주며 사는 게 최고지.”
겨울 찬바람이 아파트 앞 나뭇가지들을 텅텅 흔들어댄다. 그 옛날 엄마와 큰언니가 팽팽하게 맞잡은 이불 홑청을 동시에 텅텅 내리치던 소리처럼. 그 그리운 소리를 들으며 다림질을 한다. 남편의 셔츠 깃은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다. 바지는 날이 똑바로 서도록 곧게 다린다. 세상살이의 고단함 앞에서도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기개를 잃지 말라는 내 마음을 다림질 하는 손에 힘주어 담아 본다. 세 아이들의 옷은 반듯하고 곱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구김살 하나 없이 펴준다. 유년시절 흐리고 얼룩진 아픔도 곱게 펴진다. 내 안에 무수히 돋아나는 헛된 욕심들까지 쫙좍 다린다. 어느새 마음 속 구겨지고 접혀졌던 주름까지 확 펴진다. 어디선가 엄마의 푸우 푸우 옷감위에 물 뿌리는 소리, 푸새질 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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