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스크랩] `우리`에게 남은 것은

타리. 2009. 8. 20. 08:25
        조금 후덥지근한 날씨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아직 오월의 짜투리가 남아있고, 유월지나 칠월이 오려면 몇번의 비가 더 올 것이고, 쿨럭거리는 황사 먼지를 몇번쯤은 더 뒤집어써야 될 것이기에 설익은 땡볕이나 얼룩지는 땀 몇방울로 호들갑스럽게 투덜거리기엔 너무 이르다. 무엇보다도 겪게되는 불편이나 고통스러움을 순리라는 긍정으로 저마다 견뎌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힘들지 않게된다. 헛헛한 웃음 몇번으로 편해지는 오묘함이 있다.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나이든다는 것은 많이 포용할 수 있는 수용능력이 늘어나는 것인가보다. 맘고생이 적잖았을텐데 표정만큼은 온화하여 생각했던 것보다 위태롭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되길 원하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강렬한 욕망과 싸우다가 체념하고, 쓸쓸해지고, 고단해하고, 안개드리운 것처럼 희뿌옇다가도 작은감동 한 웅큼으로 어둡던 하늘이 금방 파랗게 걷히고, 바람은 상큼해 지기도 한다. 날로 단순해져가고 소망과 희망을 포기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 만큼 작아진 세상. 나를 위해 숨쉬는 사소한 것들에 사랑을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건강을 위한 심플라이프. 긍정의 위력이랄까. 환한 초여름의 햇살, 농익는 푸름속에서 명료한 의식으로 보내는 이 순간의 풍요로움과 마주할 수 있는 내가 있음에 가슴 떨릴때가 있어 다행이고, 모든 잡다한 일들을 뒤로 미룰 수 있는 여유의 나이듦이 있어서 때론 좋다. 허물없는 친구와의 무게 실리지 않은 대화는 삶의 디딤돌이 되어준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만큼 젊고, 회의만큼 늙었으며, 자신감만큼 젊고, 절망 만큼 늙는단다. 경제력이 튼튼하면 좋겠고 아울러 사랑도 있으면 더욱 더 좋겠지만 우리의 처지에 어디 그렇게 호박이 덩굴채 굴러 들어오겠느냐는 수다로 많이 웃는다. 그렇게 웃고나니 이런저런 일들이 뒤로 밀려나는 듯 가벼워진다. 서로 위로가 되어주는 일에 익숙해진 우리. 새로운 행복을 돈으로 구매할순 없어도 마음으로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여기는 '우리'이기에 부당한 욕심은 부리지 않지만 그 헛헛함까지야 없을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건강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나고 만다. "모든것을 이겨내는 아주 강한 울트라 처방전은 역시 건강 아니겠니?" "마져, 마져. 조금 외롭고 많이 편해지는 지름길." 이구동성으로 몸에 병이 나면 마음도 같이 병들게 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 말이 있잖어.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뒷문으로 빠져 나간다고." "그러게..가난만 들어오면 다행인데 볼썽사나움까지 들어오니 그게 탈이지." "죽일수도 없고, 살리기도 싫어지고..ㅎ" 젊은시절 사고쳐서 있는 것 다 날려먹은 것도 모자라서 할퀼 기회만 노린다는 칭구의 푸념에 어차피 봐 줬으니 조금만 더 꾸욱 눌러 참으면 안되겠니? 말은 그렇게 했어도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쩔 수 없이 허허롭다. 전쟁같은 치열함으로 열심히 고단하게 살아가는 친구와 호구지책으로 편하게 살고 싶은 나의 세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이 성숙해야 됨을 깨닫는다...슬프게도. 비 온후의 맑음에 끌려 앞산에 오른다. 간밤에 내린 비에 꽃잎이 초롱하게 맑다. 쌉쌀음한 찔레향이 온 산을 뒤흔들고 각시붓꽃의 남빛 단아함과 하얀 은방울 꽃의 청량한 울림이 잘게 부서지는 햇살아래 혼곤해진다. 간간이 젖은 새소리에 숲은 향기롭게 반짝인다.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자연의 품에 안겨 든다. 그리움이 순간 출렁인다. 영원을 약속할수 없는 그 질긴 집착은 언저리를 맴돌다 또다른 숲 길을 이어서 소통한다. 사이로 부드러운 속삭임이 흐른다. 아름다운 것도 흐르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도 같이 세월속에 버무러져 흐른다. 평탄하든 굴곡지든 감당해야 할 몫의 어질어질한 고뇌의 회전목마. 저마다의 눈물겹고 안타까운 삶이 돌고 돌아간다. 소박하고 누추하지만 충분히 행복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건강만하면 된다는 자의식으로 버티는 오기 같은게 현실에서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너절하며 진부한 이론이 되고 만다는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어차피 어느 것으로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며 해갈 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건강운운으로 무장하려는 의도 또한 제발, 눈치채지 말아주시기를. 志我 The Silver Veil / Bernward K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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